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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시즌3] 11회 나혜석, 세기의 이혼 스캔들- 인형이기를 거부한 모던걸

두영~it 2021. 12. 30. 18:36

[꼬꼬무 시즌3] 11회
세기의 이혼 스캔들
인형이기를 거부한 모던걸

나혜석

꼬꼬무 시즌3, 11회는 시대를 앞서간 여성해방론자,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한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작가 나혜석의 이야기. 이번 주 꼬꼬무 이야기 친구는 이현이, 정성호, 이미도 (SBS 2021년 12월 30일 - 목요일 밤 10시 30분)

[꼬꼬무 시즌3] 11회 나혜석, 세기의 이혼 스캔들- 인형이기를 거부한 모던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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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요약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에서 아버지 나기정과 어머니 최시의 사이의 2남 3녀 중 넷째(차녀)로 태어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배우자 김우영(이혼), 자녀 김나열(딸), 김선(첫째아들), 김진(둘째아들), 김건(셋째아들).

 

대한민국 여성으로 최초 서양화가이며, 소설가, 작가, 시인, 조각가, 페미니스트,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여성해방운동가, 언론인이다.

 

나혜석은 여성에게만 정조 관념을 강요한 낡은 조선 사회의 위선을 폭로하며 여성의 몸과 여성성, 인간다움을 열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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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신여성으로, 뛰어난 그림, 글, 시 등 다방면에 재주를 갖춘 근대 여성이었으며, 여성 해방, 여성의 사회 참여 등을 주장했다. 박인덕, 김일엽, 허정숙 등과 함께 이혼 후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으로 유명하다.


일본 유학 때부터 여권 신장의 글을 발표한 여권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연기자 나문희(본명 나경자)의 고모할머니다.

 

하지만 마지막은 철저히 홀로 외톨이가 되었고, 이혼과 정신장애, 반신불수의 비극 속에서 그녀는 낡은 시대와 끊임없는 불화를 겪으며, 1948년 12월 10일(향년 53세)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많은 활동을 펼쳤으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연애스캔들로만 주목받고 평가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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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어린시절

 

나혜석은 부유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는 등 부족함 없는 삶을 보낸 것으로 보이지만, 개인적으로 그리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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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나기정 (1863- 1915)

 

나혜석의 아버지 나기정은 구한말의 개명 인사로, 대한제국 당시 수원면장, 경기도 관찰부 재판주사, 시흥군수를 역임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도 계속 공직에 있으면서 용인군 군수를 역임했기 때문에 나혜석은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나기정 역시, 시대적인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자녀들에게 신교육을 받게 해주는 등 상당히 진보적인 엘리트처럼 보였지만, 정작 딸들에게는 정식 이름이 아닌 아명을 불렀고, 본처 최 씨의 외에도 여러 여자들을 첩으로 두었다. 심지어 나혜석이 10대일 때, 나혜석보다 불과 1살 연상인 어린 첩을 두기도 했다.

 

그 어린 첩은 기생 출신이었는데, 가장인 나기정으로부터 총애를 받는다는 자신의 이점을 이용하여 최시의에게 온갖 갑질을 했다고 한다. 본처의 입장에서 첩에게 무시를 받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 결국 최시의는 남편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많은 고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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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어머니를 가까이서 보며 자랐던 나혜석은 당시의 남성 중심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에 반감을 가졌다. 나혜석은 고통받는 어머니의 삶과 (아마도 1910년대에) 주변의 또래 친구들이 어린 나이에 강제적으로 시집보내져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절대 결혼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고도 한다.

 

나혜석의 동복형제들 외에 나계석이라는 이복언니도 있었는데, 나혜석의 아버지 나기정이 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서녀였다. 나계석은 나혜석이 태어날 무렵, 13살의 어린 나이에 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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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학력

수원 삼일여자고등보통학교 수료 / 경성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 전문학사

 

나혜석 이력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아명(兒名)은 나아지(羅兒只), 나명순(羅明順)이며, 아호는 정월(晶月)이다.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뒤 1918년 귀국하여 화가,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하였다.

 

1918년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부(서울)로 돌아와 잠시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로 지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이후 1918년 12월부터 박인덕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준비,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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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1920년 김우영과 결혼, 그와 함께 만주와 프랑스 등을 여행하였으며 그림, 조각, 언론, 문필, 시 등에서 활동했다.

 

1927년 유럽과 미국 시찰을 가게 된 남편과 함께 여행길에 올라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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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체류하던 중 야수파, 인상주의,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체류 중 최린과 염문설이 돌았고 곧 귀국 후 그림 활동에 매진하였으나, 결국 외교관 최린과의 염문으로 이혼하게 된다. 그러나 뒤에 최린과도 헤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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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정조 취미론을 발표, 순결과 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자신의 아내,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순결함을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내나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성욕을 품는 한국 남자들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한 비판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였고, 당사자들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고 집안의 뜻에 따라 결혼하는 것에 대한 비판,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들에 대한 비판 등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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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여고시절

 

나혜석은 당시 어린 한국 여성에게 바라는 모습과는 다르게 자신감 있고 총명하며 야망이 큰 아이였다.

 

1913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생 7명 중 최우등으로 졸업했는데 그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기까지 했다. 중등학교 졸업생이 신문에 소개될 만큼 당시 신교육을 받은 여성이 드물었다.

 

역사학자 이덕일에 따르면, 나혜석은 수려한 외모와 우수한 성적으로 진명여고 최우등 졸업 사실이 '매일신보'에 사진과 함께 실릴 정도로 하이틴 스타가 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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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을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장본인은 바로 둘째 오빠 나경석 때문.

 

나혜석은 1913년 둘째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일본에서의 유학 생활은 나혜석에게 생각을 열고 넓은 세상이 주는 다양함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작은오빠 덕으로 그는 비교적 유복한 유학생활을 한다. 하숙집 주인 딸과도 친하게 지내며 동경에 살고 있는 청년 화가 '사토우 야타'와 만나기도 한다.

 

후일 그의 회고에 의하면 사토우 야타는 ‘머리가 덥수룩하고 키가 짤막한 청년’이라고 했다. 그 일본 청년이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학교 기숙사까지 쫓아다녔고, 그에게 죽자 살자고 피스톨을 내밀 정도였다고 한다.

 

사토우 야타는 그에게 “당신더러 일본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조선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하며 고백했다. 그가 쓴 글이 <시라카바(白樺)> 잡지에 ‘R子에게’라는 제목으로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혜석은 사토우의 청을 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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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일본으로 건너간 이듬해인 1914년에 도쿄 유학생 잡지인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했고, 1918년에는 《여자계》에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한다. (1918년에 발표한 소설 경희는 국내 첫 페미니즘 문학으로 평가받는다.)

 

《학지광 1914년 12월호》

학지광에 기고한 글 '이상적 부인'에서 '양부 현부의 교육법'이 없는 '양처현모의 교육법'은 '여자에 한하여 부속물 된 교육주의'라며 비판, 현모양처만이 좋은 여성이 아니며, 현모양처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보는 한국사회의 여성관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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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인간임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계몽적 단편 '이상적 부인'을 쓰면서 이 소설에 매혹된 이광수와의 염문이 동경유학생들의 뜨거운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1915년 4월 나혜석은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주도적으로 재동경 여학생의 모임인 ‘조선여자 유학생 친목회’를 조직했다. 전영택과 이광수를 고문으로 특별 초빙하기도 했다.

 

한때의 애인 춘원 이광수와는 오빠 나경석의 반대로 헤어졌지만 친한 친구로 지내며 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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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첫사랑은 최승구

 

나혜석은 일본 유학시절 오빠 나경석의 친구인 게이오 의숙 학생 최승구를 만나 연애하게 된다. 오빠 나경석은 최승구와의 연애를 반대했으나 최승구와 연애를 계속한다. 다행히도 오빠는 집안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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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구는 시인과 작가로서 표현력이 뛰어났으며 한국 근대 문단의 주역이었으나 본처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최승구가 혼인을 했기에 잘못된 사랑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들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조혼이라는 풍습을 알아야 한다.

 

당시의 남성들은 어린 나이에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집안의 결정에 따라 이른 결혼을 해야 했다.

 

최승구 집안에서는 본처와 이혼을 극구 반대했으며, 나혜석의 아버지는 빨리 귀국해서 혼인하라고 압박했다. 나혜석은 1915년 1월 여자 미술학교 2학년의 3학기가 시작되기 전 1월부터 아버지의 결혼 강요와 압력으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휴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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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나기정의 결혼 강요와 학비 송금 중단에 맞서 일시 귀국, 배편으로 조선에 되돌아와 일자리를 구하던 중, 경기도 여주 공립 보통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1년간 근무하면서 돈을 모은다. 그해 일본에서 발간하는 《여자지계(女子之界)》의 창립, 발간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5년 12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며칠만인 12월 10일 아버지 나기정이 사망하여 일시 귀국, 12월 무렵 최승구의 결핵 병세가 악화되어 조선으로 돌아가 전남 고흥 군수로 있던 형 최승칠의 집에서 요양한다.

1916년 최승구는 이미 조혼해 부인까지 있었으나 나혜석은 그와 약혼을 한다. 1916년 2월경 최승구의 위독 소식을 급히 받고 일시 귀국하여 전남 고흥으로 죽기 직전의 최승구를 찾아갔다.

 

이때 도쿄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도중에 비밀리에 몰래 빠져나와 배편으로 당도했지만, 나혜석이 방문하고 되돌아간 다음날 최승구는 25세로 폐병과 결핵의 합병증으로 일찍 요절한다. (최승구는 전남 고흥군 고흥읍 남계리 오리정 공동묘지에 묻혔다.)

 

도쿄에서 애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나혜석은 미친 듯 울었고, 신경쇠약에 걸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후일 엄상섭 등은 나혜석의 불행을 최승구의 죽음에서 찾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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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김우영 결혼

 

이후 그녀는 오빠로부터 교토제국대학 법학과에 다니는 친구 김우영을 소개받게 된다. 김우영은 나혜석보다 10살이 많았고, 결혼한 적이 있었지만, 3년 전 아내와 사별한 독신이었다.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었고 나혜석이 첫사랑의 상처를 잊을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았다. 1917년 초 그녀는 마음을 추스르고 계속 학교에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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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여름, 수원의 그녀의 집으로 나경석을 찾아온 김우영을 만났고 이후 오빠 나경석의 강력한 권유로 서로 도쿄와 교토를 오가며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중간에 춘원 이광수와도 가까워져서 동시에 잠시 사귀었으나 오빠 나경석의 반대로 이광수와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으며, 당시 그녀의 관심은 남성과의 결혼이 아니라 '여성'과 '민족'에 있었다.

 

나혜석은 1918년 도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다가, 건강을 이유로 1918년 8월에 사직하면서 3·1 운동에 여성들의 참여를 조직하는 활동을 한다.

 

당시 김우영이 나혜석의 변호를 맡아주면서 그와 가까워졌다. 나혜석은 결혼을 오래 망설이다가 김우영에게 자신에게 과거에 남자가 있었음을 밝히고, 그래도 김우영이 이를 인정한다 하자 다시 조건을 제시하는데, 김우영이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결혼을 승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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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영은 전처 사이에서 이미 딸이 한 명 있었다. 나혜석은 자신이 결혼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4개 조항을 예비 신랑이었던 김우영에게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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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청첩장을 보내는 대신 그는 결혼 청첩을 신문 광고로 싣기도 했는데, 1920년 4월 1일부터 4월 10일까지 결혼식 청첩을 신문에 연일 광고하여 유명해지기도 했다. 이때 그는 4가지의 조건을 제시했고 김우영이 이를 수용하면서 서울 정동 교회 예식장에서 김필수 목사의 주례로 4월 10일 결혼식을 올린다.

자신을 평생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 말 것

시부모 봉양과 육아를 강요하지 말 것

최승구(전 남자친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그는 김우영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요구한다. 조건이 받아들여지자 조선을 떠들썩하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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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남편인 김우영에게 간략하고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릴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당대의 명문가문임에도 결혼식은 단출하였다.

 

신혼여행지는 전 남자 친구인 최승구의 묘지였다. 신혼여행지를 부인의 전 남자 친구의 묘지로 정한 것은 당대에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내세운 조건을 수용한 것과 전 남자친구의 존재 때문에 남편인 김우영은 시중으로부터 공처가, 애처가라는 비아냥과 함께 놀림감과 뒷담의 대상이 되었다.

김우영은 약속대로 아내의 첫사랑 묘소에 참배하고, 비석까지 세워주었다. 두 사람의 첨단 신혼여행은 한동안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훗날 염상섭의 소설 <해바라기>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남편 김우영은 그녀가 일할 작업장과 화실을 마련해 주었다. 남편은 미술 활동을 적극 후원했지만 나혜석의 ‘감성’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또한 김우영은 그의 조건들을 처음에는 무조건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것과, 전처소생 딸과는 따로 지내게 하겠다는 것, 그리고 전 남자 친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주겠다는 약속만 지켰다. 이후 숭의동의 김우영의 집에서 신혼을 보냈다.

남편 김우영은 1920년 12월 정신여학교 3·1 운동 주동자 김마리아, 황애시덕 등의 재판에서 변호사를 맡는다. 이는 나혜석의 권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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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일본 외무성 외교관이었던 남편 김우영을 따라 1년 8개월에 걸쳐 유럽, 미주 등을 여행한다. 한국 여성 최초의 세계일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무상 출장이 아니라 개인 여행이었기 때문에 남편 김우영은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게 되고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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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체류하던 중 야수파, 인상주의,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체류 중 최린과 염문설이 돌았고 곧 귀국 후 그림 활동에 매진하였으나, 결국 외교관 최린과의 염문으로 1930년 11월에 이혼하게 된다. 그러나 뒤에 최린과도 헤어지게 된다.

 

나혜석은 언론의 물음에 최린과 연애를 한 것이 맞다고 응답을 하지만, 최린은 그런 적이 없다며 발을 빼 버린다. 이후 "이혼고백서"에서 나혜석은 이런 최린의 태도를 비난하기도 한다.

 

나혜석은 이혼 후 오히려 너무나 시대를 앞서간 자신이 지겨워져 결별한 최린에게 위자료(당시 돈 12,000원)를 요구하게 되는데, 그에 대한 명목은 '정조유린죄'였다. 물론 법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아 패소 판결을 받았고, 이 일은 대중들이 나혜석에게 냉정해지는 원인이 된다.

 

또 당연히 이런 짓을 했으니 친가에서는 그녀가 낳았던 아들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당시 외도 중이었던 김우영은 나혜석의 간통죄를 빌미로 이혼을 요구했고, 이혼 4개월 만에 새로운 여자와 재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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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나혜석은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여자미술학사를 차리는 등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꿈꾸었다. 하지만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오빠의 경제적 지원이 끊기고 사회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들으면서, 아이들을 보지 못하는 고통으로 나혜석은 심신이 병들어갔다.

 

1935년에 경제적, 정신적 괴로움을 잊기 위해 수덕사에서 불공을 드리며 자신을 찾아온 학생들에게 유화를 가르쳤다. 불교를 이유로 1937년 신사참배령을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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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의 창씨개명령을 거부하고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으며 방랑생활을 하였다. 1944년 10월에 경성 인왕산의 청운 양로원에 들어갔으나 1945년에 파킨슨병이 악화되면서 정신이상이 심하다는 이유로 퇴소하고 보육원과 병원, 산사를 오가다가 1948년 11월에 서울의 시립 자제원 병동에 무연고자로 입원한다.

1948년 12월 10일에 나혜석이 병동에서 세상을 떠나고, 1949년 3월 14일에 무연고자 시신 공고가 실리고서야 신원이 밝혀져, 나혜석의 죽음이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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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창작활동

 

나혜석은 69편의 저작과 캔버스의 유채 작품을 통해서 신여성의 모델로 주목받았으며, 작품 속에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의 메시지와 시대 변혁을 추구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유화작품을 전시, 판매하면서 전업화가로 활동하였다. 1923년 서양화 그룹 고려 미술회의 창립멤버.

 

1930년 6월에 실험 결혼론을 주장하는 기고문을 올렸다. 결혼은 두 남녀의 만남으로, 두 사람의 일생에 부모가 일일이 정해주는 것은 잘못이고, 집안이 관여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략결혼은 결혼하는 두 남녀를 도구나, 물건처럼 보는 잘못된 것이며, 결혼을 거래로 만드는 잘못된 풍조라고 비판하였다.

유럽여행기 구미유기 등을 통하여 영국 참정권 운동을 소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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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에는 이혼 고백서를 기고하였다. 약혼과 결혼, 이혼에 이르렀던 과정과 최린과의 관계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불평등한 남녀관계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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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정조 취미론을 발표, 순결과 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아내,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순결함을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내나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성욕을 품는 한국 남자들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한 비판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였고, 당사자들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고 집안의 뜻에 따라 결혼하는 것에 대한 비판,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들에 대한 비판 등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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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나혜석


나혜석은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이 조선 여성 전체의 진보라는 점을 늘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신여성의 대표 인물로서, 조선미술전람회에 거듭 입선한 화가일 뿐만 아니라 자의식적인 여성적 글쓰기를 펼친 작가이기도 했다. 특히, 페미니즘과 최초의 여성작가라는 주제의 두 측면으로 나혜석 문학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

나혜석은 근대 사회로의 길목에 선 조선 사회에서 시대를 너무 앞선 나머지 자식들에게는 나쁜 여자로 기억되고 사회에서는 잊힌 인물이 되어버렸다. 나혜석의 예술가적 영혼이 너무나 자유분방하고 의식도 너무나 첨단에 있어 고루한 인습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의 말마따나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신생활에 들면서」)”되었던 터이다.

그의 부활은 1970년대 이후부터로, 대한민국의 여성해방인식이 대중적 확산을 이루면서 가능해졌다. 나혜석은 이제 화가, 작가, 민족주의자, 여성해방론자로서 근대기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주제적 측면에서 페미니즘이라는 계몽 의식에 투철한 작품을 썼고, 그 의식의 첨단성은 오늘날에도 새로움을 느낄 만큼 혁명적이어서 한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로서 조명되고 있다.

 

나혜석의 페미니즘적 사상은 저서 "이혼고백서"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나혜석의 페미니즘 사상을 이혼고백서 전후로 나눠 전기 페미니즘을 자유주의적인 것으로, 후기 페미니즘을 급진적인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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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된 모성 신화 해체


한편, 자신의 임신, 출산, 육아 경험을 솔직하게 토로하면서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 가는 악마”라고 규정한 「모된 감상기(母된 感想記)」는 여성 고유의 경험을 처음으로 여성의 시각을 통해 공론화시킨 것으로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모성 신화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모성이라는 것은 날 때부터 여성이 지니는 것이 아니라 기르는 동안 가지게 되는 정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여성으로서의 고유한 경험을 바탕으로 남존여비나 모성성 신비화 등에 관해 단호히 거부할 수 있었다. 이 글을 통해 그는 여성들의 고충을 앞장서서 말하며 그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선각자 역할을 하였다.

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솟아오르는 정이라고들 한다. 그러면 아들이나 딸이나 평등으로 사랑할 것이다. 어찌하여 한 부모의 자식에게 대하여 출생 시부터 사랑의 차별이 생기고 조선이 생기고 요구가 생길까. 아들이니 귀엽고 딸이니 천하며, 자보다 남자를, 약자보다 강자를, 패자보다 우자를- 이런 절대적 타산이 생기는 것이 웬일인가. (중략) 

 

그들은 절대 효를 요구하여 보은하라 명령한다. (중략) 세인들은 항용, 모친의 애라는 것은 처음부터 모된 자 마음속에 구비하여 있는 것같이 말하나 나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는다. (중략) 즉 경험과 시간을 경하여야만 있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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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된 감상기」
사 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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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능력 있는 여자였으나 개인적, 환경적, 사회적인 편견과 벽을 넘지 못하고 사장된 여성이다. 이 여성의 재능을 가리켜 '나혜석 콤플렉스'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나혜석의 시와 그림은 후대에 남아 감명을 주고, 선구안을 가진 조선 첫 페미니스트로 이름을 떨치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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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막내아들은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던 김건이다. 옥탑방의 문제 아들에서 배우 나문희가 그녀와의 일화를 짧게 얘기했는데, 나문희가 5살 때 가족들과 함께 수원으로 갔는데 "당시에 고모는 병환으로 떨고 계셨다"라고 한다.

 

둘째 아들인 김진 전 서울대 교수가 어머니를 회고하는 책을 펴낸 적이 있었다. 기사 책 제목은 <그땐 그 길이 왜 이리 좁았던고>이며, 나혜석의 글귀에서 따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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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조카인 영문학자 나영균 역시 결혼할 때 비슷한 조건을 내세웠다 한다. "살림살이에 얽매이게 하지 말고 공부를 계속하게 해 주시오. 시집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오."라고 말했다.

 

나영균은 어린 시절에 나혜석의 말년 모습을 목격했으며 흔히들 가족에게 버림받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예 외면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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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오빠 나경석이 워낙 나혜석을 아꼈기 때문에 비참하게 몰락한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해서 화를 냈다고도 한다. 한 마디로 애증의 관계였는데, 나영균 박사의 모친, 즉 나혜석의 올케는 이를 안타까워해서 나경석이 집에 없을 때 몰래 집에 들여다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파킨슨병으로 폐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일주와 유학 등으로 영어를 할 수 있으니 집에 미국인이 왔을 때 통역을 해 주기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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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작은오빠인 나경석은 독립운동가이자 화가였다. 영문학자 나영균의 부친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대단한 집안.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남매의 부친인 나기정은 친일파로 평가를 받는다. 나혜석 집안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조카인 나영균의 저서 <일제 시대 우리 가족은>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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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5월에 개최된 최초의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현대에는 여성 성상품화로 변질되어 페미니즘 진영의 비난을 받지만, 초기에는 여성참정권, 여성의 사회진출을 도모하는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이혼과 자신의 불륜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출판했다. 이 때문에 전남편 김우영은 비웃음거리가 되어 변호사로서 사실상 일을 하지 못하고 다시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된다. 다만 김우영은 나혜석과 이혼하기 전부터 첩을 두고 있었으나, 이는 나혜석의 부정을 부각하느라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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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이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적인 여성임이 맞지만 너무도 진보적인 언행은 당시 대중들에게 오히려 지탄받는 점을 알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녀는 조선 여자 가운데 뼈대 있는 부잣집 명문가 가문에서 태어나 돈 걱정 없이 일본으로 유학 후 일본 명문 여자 미술대학에서 개화된 서양문물을 접하였으며,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의 외교관+변호사 인텔리 남편을 만나 조선 여성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것과 불어, 독어, 영어, 일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그녀가 접한 사회는 100년 후 현재 평범한 대한민국 여성들도 누리기 힘든 혜택인데 폐쇄된 일제강점기 여성들이 바라본 나혜석은 신여성을 뛰어넘어 그녀의 발언에 큰 이질감이 느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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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남편인 김우영에게 결혼하기 전에 내세웠던 몇 가지 조건들은 현대인의 시각에서도 이해하기 힘든 만큼, 당시 평범한 조선 여성들이 그녀의 주장에 공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로 치자면 처음부터 좋은 환경 좋은 집안에서 금수저 물고 태어나, 굳이 진보적인 여성을 자칭하지 않아도 충분히 진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이 먹고살기도 빠듯한 여성에게 "결혼도 출산도 하지 말고 그대들의 인생을 살아라"라고 설파하고 다닌다면 설파받는 여성 입장에선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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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나혜석이 자신의 자식을 두고 한 공개적인 발언은 현대인의 선진적 기준으로는 아동학대에 해당한다. 아동인권적 목적이라기보다는 아이를 위한 어머니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던 시절에는 더했을 것이다.


나혜석은 이혼고백장이라는 글을 통해 약혼 시절부터 결혼생활을 차분하게 회고했다. 이혼사건의 발단이 된 최린과의 관계도 직접 고백했다. 그러나 이 글의 진위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논란이 될 만한 또 다른 발언들에만 관심을 가졌다. "다른 남자나 여자와 좋아 지내면, 반면으로 자기 남편이나 아내와 더 잘 지낼 수 있지요."와 같은 발언에 집중해서 나혜석을 문란한 여자라고 규정지었다.

 

 

사진출처: SBS 꼬꼬무 시즌3, 한계레:온, Google Arts&Culture, 나혜석-페미위키, 나무위키, 위키백과, 선을 넘는 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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