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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시즌3] 5회 1 vs 1000의 사나이 신출귀몰 경성 피스톨 독립운동가 김상옥

두영~it 2021. 11. 17. 22:50

[꼬꼬무 시즌3] 5회 독립운동가 김상옥

1 vs 1000의 사나이 신출귀몰 경성 피스톨


꼬꼬무 시즌3, 5회 "목표는 단 하나! 총독을 제거한다" 1 vs 1000의 사나이, 신출귀몰한 총잡이, 그의 정체는? 독립운동가 김상옥.

오늘(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인데, 그 때문인지 꼬꼬무 5회, 내일 방송에서는 지금까지 꼬꼬무에서 다루었던 역대 사건들 중 가장 과거의 일, 2021년 기준 98년 (곧 100년) 전의 이야기를 방송한다.

 

 

꼬꼬무 5회 이야기 친구

이번 주 꼬꼬무 5회 방송 이야기 친구는 윤균상, 황우슬혜, 조정식 (SBS 2021년 11월 18일 - 목요일, 10시 30분 방송)

 

 

꼬꼬무 5회 독립운동가 김상옥 일대기1

"1 vs 1000의 사나이 신출귀몰 경성 피스톨" 김상옥 요약.

김상옥 (1889년 1월 5일 출생~ 1923년 1월 22일 사망, 향년 33세), 일제강점기 의열단원으로 한당 사령 부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일제강점기 초기의 무장 독립운동과 의열단의 용감한 투쟁을 상징하는 인물.)

서울 한복판에서 1대 1000의 독립전쟁, 김상옥 의사는 사이토 조선 총독의 암살까지 계획했지만 일본 경찰에 의해 은신처가 발각되자 남산에서 수유리까지 피신했다가 다시 종로 효제동으로 돌아와 십여 일간 전무후무한 서울 시내 총격전을 벌이며 일본 경찰 십 수 명을 사살하고 저항하다 포위된 상태에서 마지막 한 발의 총탄으로 자결한 인물이다.

당시에는 세상을 뒤흔들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인물.

 

 

독립운동가 김상옥

김상옥

 

김상옥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한학을 수학 하는 동시에 어의동보통학교를 다녔다. 14세부터 낮에는 철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하여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1910년에는 경성 영어학교를 다니며 국제정세와 서양문화에 안목을 넓혔다.

 

 

영덕철물점

1912년에는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점을 경영했는데, 종업원만 50명에 가까울 정도로 컸다고 한다. 이때 김상옥은 사업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하며 독립자금을 조달했다.

 

 

김상옥은 종업원들에게 노동조합을 통해 자신들의 권익을 찾을 수 있게 도왔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은 '동대문 홍길동'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듬해 1913년에는 정진주와 혼인하였다.

 

 

말총모자

당시 단발령으로 잘린 머리를 감추기 위해 모자가 유행했는데 이 모자들이 대부분 수입산이었다. 그래서 김상옥은 말총을 이용한 모자를 만들어 저렴한 가격에 판매했고, 이 모자가 큰 인기를 끌었다는 기록이 있다.

1917년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일화 배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농구 장갑 양말 등도 아울러 생산해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국산품을 장려하는 데 앞장섰다.

 

 

김상옥 독립운동가

상술도 뛰어나고 다재다능한 재능이 있었던 김상옥 의사는 철물점 주인으로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독립운동이 우선이었나 보다.

 

 

혁신공보

독립운동에 투신

1919년 기미년의 3.1 운동 직후, 이때부터 김상옥은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윤익중, 신화수, 정설교 등의 동지들을 모아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신문 '혁신공보'를 발행해 배포한다.

 

김상옥 의사는 무장투쟁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며, 3·1 운동 당시 만세를 외치던 조선인 여학생을 살상하려는 기마경찰을 맨손으로 때려눕혀 검을 빼앗았을 만큼 무술에도 능했다.

당시 총을 다루는 솜씨는 말 그대로 명사수라 불릴 만큼 비범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때 빼앗은 검이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암살단

김상옥 의사는 1920년 8월 24일 미국 의원단이 동양 각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에 접하자, 그 해 5월부터 김동순, 윤익중, 신화수, 서대순 등의 동지를 지휘해 환영하기 위해 나오는 총독 사이토 및 일본 고관을 암살하는 계획을 추진한다.

그러나 거사 계획은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었고 동지들이 붙잡혀 단독으로 거사를 추진했으나 여의치 않자, 10월 말 상해로 망명한다.

 

 

의열단

그 뒤 1920년 11월 상해로 망명한 김상옥은 임시정부요인 김구,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등과 독립운동 거사 계획에 참여하는 동시에 의열단에 입단한다.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는 비장한 한 마디를 남기고 김상옥은 2년여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데, 그가 말한 '거사'는 국내로 잠입하여 사이토 총독을 죽이겠다는 것.

 

 

김상옥 의사의 어록

상해를 떠나면서 남긴 김상옥 의사의 이 말은 사실상 유언이 되었다. 서울 종로구 효제초등학교에 이 어록의 비문이 세워져 있다.

 

 

독립운동가

1921년 7월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을 위해 한때 귀국해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모금하여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으며 이 무렵 한당 사령 부장을 맡게 되었다.

1922년 11월 중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시영, 이동휘, 조소앙, 김원봉 등과 의논해 조선 총독 및 주요 관공서에 대한 암살 및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는데 1923년 1월 사이토 마코토가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도쿄행을 기회로 총살하려는 계획이었다.

 

 

순국선열의 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안홍한을 수행시켜 권총 4정과 실탄 수백 발, 대형 폭탄은 의열단에서 맡아 김한으로부터 받기로 하고 안동현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경성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김상옥은 상하이를 떠나면서 농부 차림으로 변장하고 밤을 틈타 압록강 철교를 건너면서 경비 경관을 사살하였고 신의주에 들어와서는 세관 검문소 보초를 권총으로 머리를 때려눕히는 등 격투 끝에 국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이후 서울에 와서 김한, 서대순 등 동지들과 만나 총독을 암살하기 위한 치밀한 거사 계획을 세웠으나 상하이 주재 일본 경찰의 통보로 일제가 경계를 강화하자 총독 암살 거사는 시일을 끌게 되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투척

1923년 1월 12일 밤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는데 이 폭발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고 행인 남자 6명과 여자 1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큰 소동이 났다.

 

마루야마 경무국장이 수사를 진두지휘하고 경성 검시국의 오하라 검사가 나서 수사를 했지만 의거 당시만 하더라도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일본 경찰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1월 17일 일본 경찰은 의거의 장본인을 알아내고 은신처를 추적하였는데 1월 17일 새벽 3시 은신처인 매부 고봉근의 집이 종로경찰서 수사 주임 미와 와사부로에게 탐지되었다.

 

종로경찰서 우메다와 이마세 두 경부의 지휘 아래 20여 명의 무장 경찰에게 은신처가 포위되었는데 고봉근의 행랑방에 있던 여자가 종로경찰서에 있는 친정오빠에게 밀고하여 탄로 난 것이다.

 

 

종로경찰서

은신처가 탄로 나자 김상옥은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먼저 종로경찰서 유도 사범이며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한 다음에는 이마세와 우메다 경부를 사살하고 다른 일본 경찰 수 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에 추격하는 일본 경찰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가옥의 옥상을 뛰어다니며 도주했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일본 경찰은 김상옥 의사를 찾기 위해 난리를 피웠다.

 

 

일본 경찰은 군대까지 불러 산을 포위했지만 김상옥은 눈 덮인 남산을 거쳐 금호동에 있는 안장사에 이르러 스님에게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하고 교묘하게 산을 내려왔다.

 

1월 18일은 무내미 이모집에서 유숙하고 1월 19일 새벽 삼엄한 일본 경찰의 경계망을 피해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은신하며 동상도 치료하는 등 앞으로의 거사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1923년 1월 22일 새벽
일본 경찰들

그러나 1923년 1월 22일 새벽 최후의 은신처마저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상하이로부터의 서신이 효제동으로 온 것을 전해 준 전우진이 일본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붙잡혀 고문당한 끝에 은신처가 발각된 것이다.

 

1월 22일 5시 반경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가 총지휘관이 되고 보안과장 후지모토가 부지휘관이 되어 시내 4곳의 경찰서에 총비상령이 내렸다. 기마대와 무장 경관 400여 명이 은신처를 중심으로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였으며 왜경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김상옥 의사는 자신이 태어난 동네이자 동지 이혜수의 집이 있는 종로구 효제동에서 일본 군경 1,000여 명에게 포위된다.

 

 

김상옥 자결
김상옥 총격전
김상옥 의사 총격전 자리

김상옥은 미처 피신하지 못하자 권총으로 무장한 다음 방 안 벽장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는데, 구리다 경부가 방으로 들어와 벽장 안을 열어젖히고 들어오자 김상옥은 그를 가장 먼저 사살했다.

 

이후 벽장과 붙어 있던 집 벽을 뚫고 순식간에 옆집 74번지를 지나 76번지로 피신하였으나, 겁에 질린 76번지 집주인이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자 다시 담을 넘어 72번지로 갔다.

 

이후 담벼락을 지탱해 권총 두 자루로 무려 3시간 반 동안이나 총격전을 벌이다가 총알마저 떨어지자 벽에 기댄 채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마지막 1발을 스스로의 머리에 쏘아 자결해 순국하였다.

 

 

김상옥 최후순간까지 대항 동아일보
김상옥 자취
김상옥 의사 일본 경찰

순국하는 당시의 일화에도 일본제국 경찰들이 김상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잘 나타난다. 김상옥 의사는 마지막 총알로 자결한 후에도 양손에 권총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멀리서 이 모습을 본 일본제국 경찰들은 김 의사가 살아 있을까 봐 다가가지 못했고, 결국 김 의사의 어머니를 보내 생사를 확인하게 했다고 한다.

 

 

나중에 김상옥의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했을 때 확인한 결과 몸에는 총 11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자결에 사용한 두부의 한 발을 제외하면 10발의 총알을 맞은 것이다.

 

신념은 총알로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증명한 셈. 이 과정에서 구리다 경부를 위시한 수많은 경찰 간부가 사살되었고 일본 경찰 16명이 사상당했다. 수백여 명의 추격을 받은 데다, 총격전이 3시간 반이나 벌어졌음에도 피격당한 총알이 10발밖에 안 된다는 것도 대단하다.

 

 

구본웅
구본웅 시화집

이때의 광경을 당시 17살이던 서양 화가 구본웅이 목격했다고 한다. 구본웅은 자신이 목격한 김상옥 의사의 죽음을 시화집 '허둔기'에 그림과 글로 남겼다.

 

 

김상옥 의사가 사용한 폭탄 모형

의열단원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의 장본인인지에 대한 의혹은 풀리지 않았다.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서울역에서 암살하는 것이었기 때문.

일본 경찰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면 당연히 총독의 개인 경계도 강화될 것이 뻔한데 그런 거사를 힘들게 만드는 우를 범할 이유가 있었겠냐는 것. 일제는 진짜 장본인을 찾지 못하고 김상옥의 소행으로 단정해서 그를 추격했다는 것이다.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을 실제로 실행한 인물로는 무명지사 김상환, 맹호 단원 이강연, 고려 공산 단원 이한호 등이 제기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당시에 암살하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하여 목표를 종로경찰서로 변경한 것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종로경찰서는 의열단 이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원수의 소굴이었고, 숱하게 많은 이들이 그곳 취조실에서 몸이 부서졌고, 이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일본 정예 경찰력이 집결해 있던 일종의 심장부였다. 그런 곳에 1923년 1월 12일 밤 8시 폭탄이 떨어진 것이다.

 

 

프랑스제 수류탄

종로경찰서에 투척된 폭탄은 보통의 독립운동가들이 무장 투쟁에 사용하던 폭탄과는 달리, 위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이 정도의 고성능 폭탄을 제조할 기술력을 지닌 독립운동 단체가 의열단밖에 없었던 것이 거의 분명하므로 김상옥의 의거로 보는 것이 맞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것은 일종의 실험적인 의거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제조된 폭탄의 위력이 실전에서는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는지 시험도 해 볼 겸 조선총독부와 일본 경찰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는 것이다.

 

 

이태준

KBS 다큐 등에 따르면 폭탄의 제조자는 이태준 선생이 소개해 준 헝가리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다만 이태준은 이미 1921년 죽었고, 사건은 2년 후의 일이므로 사실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김상옥이 사용한 권총

김상옥이 전투에서 사용한 권총.

 

실물은 찾지 못했고, 증거품으로 찍힌 상단의 사진만 전해진다. 형태로 보아 은닉이 쉽도록 개인적으로 개조한 모양이라고 한다. (스미스 & 웨슨 38 DA Revolver 38S&W와 비슷하다.)

 

 

김상옥

김상옥 의사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및 독립장에 추서 되었으며, 국가보훈처에서 1992년부터 선정/발표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최초로 선정된 인물이다. (1992년 1월)

 

보통 여느 독립투사들이 벌인 의거를 기리는 행사를 할 때 '의거 기념식'이라는 표현을 쓰고 사망자들은 순국 '추모식'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런데 김상옥 의사는 사망일이 1월 22일임에도 '순국 추모식'이라는 말 대신 '시가전 승리 기념식' 또는 '독립활동 기념식'이라는 용어를 쓴다.

 

비록 일본제국 경찰과 서울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시고 마지막 한 발로 순국했으나, '시가전'이라고 칭송될 만큼 혁혁한 공로를 세운 데다 당시 일제에 준 충격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역사가에 따라서는 김상옥 의사가 펼친 활약으로 일본에 억눌린 우리 민족이 저항을 위한 의지를 되찾았고 이후 항일 무장투쟁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 생존 애국지사 중 한 명은 어릴 적 신문에 난 김상옥 의사의 투쟁을 보고 '일본 놈들은 수천 명인데 왜 이분은 홀로 싸우시는가?'라며 독립운동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마로니에 공원 김상옥 동상
김상옥로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는 김상옥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의사가 순국한 곳이 있는 종로 4가 북쪽 효제초교 앞길은 그의 이름을 딴 "김상옥로"로 명명되었다.

 

 

김상옥의거터
김상옥 폭탄 던져 의거한자리

종로 5가 효제동 김상옥 의사 의거 터라는 정류장(정류장 ID : 01-204)이 있다.

 

 

암살 하정우이몽

일본 철혈 통치의 핵심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군경에 혼자 맞서 총격전을 벌일 정도의 인물임에도 대중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고 대중매체에서도 다뤄지지 않았다.

 

드라마틱한 생애로 영웅 그 자체이기에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데 적합한 인물이지만 실제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광복 이후 영화화를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이 엎어졌다.

 

 


만화 <각시탈>과 2012년 KBS 드라마 <각시탈>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라는 얘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는 배우 하정우가 작중 등장인물인 하와이 피스톨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밀정>에서 작중 등장인물인 김장옥은 김상옥 의사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며, 배우 박희순이 연기했다.

 

2019년 MBC 드라마 '이몽'에서는 배우 조복래가 연기했던 의열단원 김남옥이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 사진출처, 글 참고

SBS꼬꼬무, KBS 역사저널 그날,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ㅍㅍㅅㅅ, 한韓문화 타임스, 위키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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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옥 의사 다큐멘터리 요약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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