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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시즌3] 13회 출격 1954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FIFA 월드컵 스위스)

두영~it 2022. 1. 13. 15:27

[꼬꼬무 시즌3] 13회
출격 1954 -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이야기 친구 - 이현이, 안성준, 제갈성렬)

이번 주 꼬꼬무 시즌3, 13회는 1954년 6월, 전쟁이 끝난 지 채 1년도 안되어 폐허가 돼버린 대한민국의 첫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팀의 이야기다.

[꼬꼬무 시즌3] 13회 출격 1954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FIFA 월드컵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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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1954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5번째 FIFA 월드컵. 1938년 프랑스 대회 이후 16년 만에 유럽에서 개최된 월드컵이다. 개최지 결정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6년에 결정되었다.

 

공식적으로는 FIFA 창설 50주년을 맞이하는 대회이니 FIFA의 본부가 있는 스위스에서 개최하는 것, 사실은 유럽 대륙 대부분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쑥대밭이 되어서 유럽 국가 중에 그나마 대회를 개최할 여력이 있는 나라는 2차 대전 당시 중립국이던 스위스뿐이었기 때문에 스위스에서 개최한 것.

 

이 대회에서부터 최초로 TV 중계가 이루어졌으며, 사실상 현대 월드컵의 시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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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FIFA 월드컵 스위스는 대한민국이 독립한 아시아 주권국가 중에서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기념비 같은 대회였으며, 그 후 1986 멕시코 월드컵 대회에 진출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본선 진출을 한 대회였다.

 

이 대회부터 패전국인 서독과 동독, 일본의 출전 금지가 해제되었다. 26경기에서 총 140골이 쏟아져 나와 경기당 5.38골을 기록한 다득점 대회로 기록되었으며, 월드컵 역대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인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의 7:5 경기도 이 대회에서 나왔다.

 

그야말로 공격축구가 찬란히 만개했던 대회. 특히 매직 마자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헝가리는 한국을 9:0으로 개박살내는 등 5경기에서 27 득점을 기록하는 공격력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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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월드컵 축구대표팀

 

1954년이면, 일제강점기로부터 한국이 독립한 지 불과 10년도 안되었던 시절이며, 1954년 6월 열린 스위스 월드컵은 한국이 정전협정(1953.7.27)을 맺은 지 채 1년이 안된 시기였다.

 

당시 스위스를 찾은 선수 20명의 소속팀은 헌병 감실, 병참단, 특무부대, 해군 그리고 조선방직. (1950년대 한국사회의 축소판이었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는 쑥대밭이 됐다. 정부는 피난을 떠나고 정전협정 때까지 부산에 머무를 때 대한체육회는 부산시 광복동에 연락사무소를 마련하며 이곳에 책상 한 개를 펴놓고 축구인들 동정을 파악한다.

 

그 와중에 이듬해인 1951년 10월 6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제5회 전국 축구선수권대회가 열린다. 대회 소식을 듣고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던 축구인들이 한 데 모이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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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즈음 군은 체육에 큰 관심을 보였다. 체육행사를 통해 탈환 지구의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이 건재함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축구, 빙상, 육상, 사이클 등 각 종목의 유명 체육인을 군에 입대하도록 했다. 운동을 제대로 하기 힘들었던 선수들 입장에서도 경기만 하면 된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특무부대, 병참단, 헌병 감실 등 1950년대 축구계를 주름잡던 군부대 축구팀이 하나 둘 생겨난다. 대부분 선수들이 군 팀에 몸담았기에 전국체전에 도시 대표로 참가하는 팀도 거의 다 군부대 팀이었다.

 

1950년대 전국 축구선수권대회 우승팀 명단에도 병참단, 헌병사령부, 특무대가 돌아가며 이름을 채웠으니, 독일 프로리그 분데스리가(Bundesliga)에 빗댄 명실상부 '군대스리가'의 한국 축구였다. 당대를 대표하던 팀 중 유일하게 군부대가 아닌 팀은 조선방직이었다. 

 

※ 조선방직 : 1917년 11월. 부산부 동구 범일정(현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위치한 일제 산업자본이 만든 국내 첫 기계제 방직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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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일전

 

1954년 3월, 때는 세 달 뒤에 스위스에서 열릴 월드컵을 위해 아시아 지역 예선이 한창이던 때였다. 

 

원래는 대한민국, 일본, 중화민국, 베트남 공화국, 인도까지 이 5개 국가가 아시아 지역의 1장의 본선 티켓을 두고 예선을 치를 예정이었지만 베트남과 인도는 참가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중국은 기권하면서 한국과 일본만이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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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팀은 홈 앤드 어웨이로 경기를 할 계획이었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대표팀의 입국을 거부하면서 2경기 모두 일본 도쿄에서 치르게 된다.

 

시대가 시대여서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팀이 한국땅을 밟는 것을 반대해 버린 것. 이때 이승만 대통령의 전설적인 어록이 있는데, "일본을 이기지 못하면 현해탄에 빠져 죽어라." 발언이 바로 그것이다. 

 

※ 홈 앤드 어웨이(Home and Away) - 자기 팀의 연고지에서 상대를 맞아 경기하고, 반대로 상대 팀 연고지에 가서 경기하는 프로스포츠의 한 방식이다. 자기 팀이 정착해 있는 연고지를 홈 그라운드, 줄여서 홈이라고 부르며, 한국에서는 비유적으로 안방이라는 표현도 자주 사용한다. (상대팀 연고지에서 경기하는 걸 어웨이, 로드, 또는 원정 경기, 줄여서 원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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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열리게 된 최초의 한일전, 일본 관중만이 가득 찬 경기장에서 우리 대표팀은 수많은 야유 소리를 비웃듯, 일본을 1차전에서 무려 5:1로 대파한다.

 

2차전에서는 2:2로 비기면서 결국 종합 스코어 7:3으로 대한민국 대표팀은 '아시아 최초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타이틀을 가져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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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 과정

 

여차저차 월드컵에 나가게 된 대한민국은 헝가리, 서독, 터키와 한조에 편성된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월드컵에 나간 그들에게는 하나의 장애물이 더 남아있었다.

 

독립한 지 갓 10년이 못된 신생 독립국, 여기에 6.25 동란까지 겪은 직후라 정부에서는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 나간 대표임에도 제대로 된 지원을 해줄 형편도 겨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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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FIFA 월드컵 축구대표팀은 단복이 없어 협회 임원 중 한 명이 아는 사람에게 직접 외상으로 양복을 빌려야 했고 스위스로 직행하는 티켓을 미리 구해놓지 못해서 경기 날짜에 맞춰가기 위해 선발 선수들 11명은 먼저 급하게 미군 수송기 구석에 얻어 타고 나머지 선수들도 일본 도쿄 - 태국 방콕 - 인도 콜카타 - 파키스탄 카라치 - 이탈리아 로마를 거치는 장거리 비행을 해야 했다.

 

그마저도 티켓이 부족해 몇 명은 못 탈뻔했지만 일본에 신혼여행을 왔던 영국인 부부가 사정을 듣고 티켓을 양보한 덕에 간신히 스위스에 도착할 수 있었고, 2진은 뒤늦게 구한 에어 프랑스의 항공편을 통해 스위스에 도착한다.

 

이미 다른 나라들은 개막 한 달 전부터 날아와 현지 적응을 하고 있었지만 한국은 개막식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경기하기 이틀 전 밤에야 겨우 도착했다.

 

제대로 된 매니저도 없었던 대표팀은 스위스에 와서도 숙소를 찾느라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하루 전에도 경기에 입고 뛰어야 할 유니폼 등번호를 바느질하고 축구화를 손보느라 연습할 시간도 부족했다.

 

훈련은커녕 공도 제대로 못 만져본 대표팀은 그렇게 첫 월드컵 무대, 헝가리와의 경기를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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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전 (對 헝가리)

 

한국은 본선 참가국 16개국 가운데, 헝가리, 터키, 서독과 함께 본선 B조에 편성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B조 첫 상대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고, 1953년에는 축구 종가를 자처하던 잉글랜드를 6:3과 7:1로 박살 내버린 당대 최강 헝가리였다.

 

이런 헝가리를 상대로 대한민국 선수들이 내세울 건 악바리 정신밖에 없었다. 하지만 악바리 정신만으로 모든 걸 이겨내기엔 시차, 여행 피로, 기후, 음식, 실력차까지 너무 많은 점이 헝가리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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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7일 취리히에서 헝가리를 상대로 열린 경기, 한국팀은 전반 10분 동안은 대등한 경기를 펼치기도 했으나 작은 대포 푸스카스(푸슈카쉬)를 시작으로 헝가리의 득점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전반 4골을 실점하며 어떻게든 버티던 한국팀이었으나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피로 누적으로 인한 체력 고갈은 현실로 다가왔다. 경기 도중 민병대, 최정민, 성낙운, 우상권, 강창기, 박일갑 등의 선수들은 다리에 쥐가 나거나 탈진해서 쓰러지고 나중에는 7명만 뛰어야 했다.

 

게다가 당시 한국대표팀은 딱 11명에 맞춰 1진만 온 데다가 당시엔 골키퍼를 제외하면 선수 교체 규정조차 없었다.

 

이런 눈물겨운 투혼 때문에 이 날의 승장이었던 헝가리 구스타프 세베 슈(1906~1986) 감독 또한 "한국 팀은 사자처럼 용감했다. 쓰러져도 계속 일어나 뛰었다"라고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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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벽은 너무나도 높았다.

 

결국 필드 플레이어들이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홍덕영 선수는 헝가리 선수들의 슈팅을 막아내야 했다. 헝가리는 손쉬운 상대 한국을 유린하며 후반 20여분을 남기로 4골을 몰아치며 9:0 완승을 챙겨갔다. 한국의 0:9 패배였다.

 

아직도 이 9점 차 패배 경기는 월드컵 최다 득점차 경기로 남아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졸전을 치렀거나 아시아와 세계의 축구 수준 차이를 실감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대한민국이 헝가리를 상대로 0:9로 끝낸 것은 예상 밖으로 엄청나게 선전한 것이었다. 실력 차이도 있었지만 안 그래도 약한 팀이 컨디션이나 상황이 최악인 상태에서 대회를 출전했기에 훨씬 더 큰 점수차가 나도 이상할 게 없었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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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영 골키퍼

 

이 경기에서 대한민국의 골문을 지켰던 홍덕영 골키퍼는 혼신의 힘으로 헝가리의 무지막지한 슈팅 공세를 수 차례 막아내는 눈부신 활약을 펼쳤는데, 경기가 끝나고 일부 관중들이 이런 활약에 감동하여 사인도 받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홍덕영은 이날 경기에 대해 "푸스카스의 슛은 정말 강해서 위잉 소리가 났고, 맞으면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라고 훗날 회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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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전 (對 터키)

 

헝가리전에서의 대패로 인해 분위기도 가라앉은 데다가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상대로 진을 다 뺀 한국은, 뒤늦게 간신히 스위스에 도착한 2진 선수들을 주축으로 이후 2차전 터키와의 경기를 치렀으나 역시 매우 무기력한 경기를 펼쳤고, 결국 0:7로 대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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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한민국 대표팀 김용식 감독

 

김용식 감독은 당시 대진운만 보고도 이미 대한민국에게 꿈도 희망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라는 그 유명한 말로 선수들과 전의를 다지고 경기에 임했다.

 

하지만 그 한 골을 넣기에도 세계와의 격차가 너무도 컸고, 조 추첨 운도 너무 없었으며, 열악한 조건 탓에 그 소박한 목표조차 이루지는 못했다.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대회 포스터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대회 포스터 중에 태극기가 완전히 가려진 것도 있다. 당시 한국의 국가 인지도를 느끼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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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꿀

 

이러한 시련을 겪었던 대한민국 대표팀이 시간이 흘러 1986 월드컵 우승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월드컵 첫 골을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위를 달성하고, 토고를 상대로 원정 첫 승에 그로부터 4년 후에는 원정 16강 15위까지 달성한 것과 이 대회 우승팀 독일까지 이긴 것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와도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 사이에 있었던 한국의 놀라운 경제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 상전벽해 뜻 -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다. 즉, 세상 일이 몰라보게 확 달라졌다는 뜻의 사자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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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의 창시자, 쥘 리메

 

"한국이 지금은 처참하게 패했을지언정 수십 년 뒤엔 어찌 될 줄 누가 알겠는가." 바로 월드컵을 만든 세계 축구의 아버지 쥘 리메(Jules Rimet 1873~1956)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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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없어 미군 수송기를 얻어 타고 선수 단복이 없어 양복을 빌려 입고 유니폼이 없어 직접 바느질을 해야 했던 축구팀. 대한민국 대표팀의 첫 월드컵 이야기는, 오늘(2022년 1월 13일) 목요일 밤 10시 30분 꼬꼬무 시즌3 방송에서 볼 수 있다. ♡

 

사진출처, 글참고 : 꼬꼬무 시즌3, 나무위키, 풋케위키, 이로운넷, 유튜브 세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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