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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시즌3] 15회 나를 찾아줘 - 1960 되살아온 아이 (김주열 열사)

두영~it 2022. 1. 27. 15:25

[꼬꼬무 시즌3] 15회

나를 찾아줘 - 1960 되살아온 아이
김주열 열사
(이야기친구- 이현이, 유주, 진선규) - 2022년 1월 27일, 밤 10시 30분 SBS 방송

이번 주 꼬꼬무 시즌3, 15회는 1960년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희생당한 김주열(金朱烈, 1944년 10월 7일 ~ 1960년 3월 15일) 열사 이야기다.

김주열 열사의 희생은 1960년 4월, 한국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시민들이 들고일어나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4.19 혁명은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끝낸 민주주의 시민 혁명이다.

[꼬꼬무 시즌3] 15회 나를 찾아줘 - 1960 되살아온 아이 (김주열 열사)

꼬꼬무 시즌3 김주열 열사

김주열 (金朱烈, 1944년 10월 7일 ~ 1960년 3월 15일)

 

김주열 열사는 전라북도 남원시 옹정리에서 아버지 김재계와 어머니 권찬주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넷째)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태종은 해방의 혼란기에 면장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조합장을 지낸 천석꾼 부잣집이었다.

 

어머니 권씨는 경남 함양군 사람으로 '함양댁'이라 불렸으며 이는 김주열의 영남 지방과의 인연을 암시한다.

 

김주열 열사는 1956년 금지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 뒤 1960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 같은해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이후 3월,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된 뒤 실종 27일 만인 4월 11일 창원시 마산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알루미늄제 최루탄이 눈에 박힌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꼬꼬무 시즌3 김주열 열사1

그의 죽음과 시신 발견 소식은 4월 12일 부산일보 허종 기자의 기사로 세상에 알려지며 전국으로 번져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도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폭행으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다.

김주열 열사의 묘는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 국립 3.15 민주묘지와 서울 4·19수유리 국립묘지가 있으며, 실묘는 그의 고향인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에 있다. 사후 김주열을 기리는 범국민장이 사후 50년 만인 2010년 4월 11일 마산중앙부두에서 거행되었다.

 

 

꼬꼬무 시즌3 김주열 열사2

전북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김주열 열사의 생가 (왼쪽부터 김 열사의 동생 택열, 어머니, 막내동생 길열, 큰누나)

 

가족
할아버지 김태종
아버지 김재계(1922 ~ 1965), 어머니 권찬주(1920 ~ 1989)
큰누나 김영자(1936 ~ ), 작은누나 김경자(1941 ~ )
형 김광열(1942 ~ 1985), 남동생 김길열(1955 ~ )

 


꼬꼬무 시즌3 김주열 열사3

◆ 김주열 열사는 전북 남원이 고향인데, 왜 경남 마산까지 왔던 걸까??

 

김주열 열사는 1959년 남원 금지중을 졸업하고 이어 진주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너무 멀다는 이유)로 남원농업고등학교(현 남원 용성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몇 달을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재수를 시작한다.

 

1년 후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지며 가세가 기울자 김주열은 서울로 올라가 학비가 별로 들지 않는 철도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지만 실패하고 서울고등학교에 원서를 낸다.

 

그러나 형 친구 하용웅(형 김광렬의 친구이자 형같이 따르던 형)의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면 은행원을 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권유로 마산상업고등학교에 다시 원서를 내게 된다. (당시 마산상고는 명문고였다.)

 

마산상고 입시를 치르고 돌아와 1960년 3월 14일로 예정된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형 김광렬과 함께 마산으로 갔지만, 합격자 발표는 3월 16일로 연기되어 있었다. (이유는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군중이 모이는 것을 극도로 꺼린 교육청에서 합격자 발표의 연기를 종용했기 때문.)

 

이후 하용웅 선배의 담임 선생님을 통해 합격(그것도 장학생으로~)했음을 확인했지만 당시 마산에서 남원까지 꼬박 하루가 걸려서 첫차를 타지 못하면 도중에 유숙해야 했기 때문에 곧장 남원으로 귀향하지 못하게 된다.

 

당시 김주열의 이모할머니는 열렬한 민주당 당원이었는데 자유당의 부정 선거로 인해 투표 통지표가 전달되지 않아 종일 울분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산에서의 부정 선거가 들통이 났고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자 이를 목격한 이모할머니가 집으로 와서 두 형제에게 시내에 나가보라고 한다. 이에 형제는 시위에 합류하게 되었지만 김주열은 돌아오지 않았다.

 

 

꼬꼬무 시즌3 김주열 열사4

3월 15일 이후로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어머니 권찬주는 한 달 가까이 마산 거리를 분주히 돌아다닌다. 자연히 시민들의 입에는 김주열이란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고 관심도 집중되어 있었다.

 

 

꼬꼬무 시즌3 김주열 열사5

어머니 권찬주는 끝내 아들을 찾지 못하고 4월 11일 남원으로 돌아온다.

 

그 와중에 별별 소문이 다 났는데, 심지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마산시청(現 마산세무서 부지) 뒤에 있었던 저수지의 물을 몽땅 퍼내고 시신 수색을 하기도 했을 정도.

 

하지만 찾지 못했고, 결국 그날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올랐다.

 

 

꼬꼬무 시즌3 김주열 열사6

김주열은 3월 15일 형 김광렬과 함께 저녁 시위에 참여했고 시청 앞 발포 이후 경찰이 시신을 거두어들이던 중 오후 10시경 자산동 옛 한전 앞에서 최루탄을 맞고 죽은 상태로 발견된다.

 

당시 김주열의 시신을 발견한 경찰은 손석래 서장에게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지 물었고 알아서 처리하라는 손 서장의 명령을 듣고 한 사업가의 운전기사를 시켜 마산세무서에서 마산항으로 옮겨 바다에 버리게 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김주열의 어머니 권 씨가 아들을 결국엔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 11시경, 김주열의 시신은 마산의 중앙 부두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떠오른 것.

 

 

꼬꼬무 시즌3 김주열 열사7

사망한 지 1달가량이나 지났지만 당시 바닷물이 굉장히 차가워서 거의 냉동 상태였기 때문에 김주열의 시신은 부패되지 않았다고 한다.

 

김주열의 시신은 도립마산병원에 안치되었고, 경찰 당국의 은폐하려 했던 사실과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마산 시민들에게 전해졌다. 이에 흥분한 3천여 명의 시민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병원 안으로 밀려들어가 김주열의 사망을 확인했고, 그의 시신은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상태였다.

 

어머니 권찬주는 시신을 찾고 나서 "시신을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아들이 셋이 있는데, 셋을 다 가져가도 좋으니 진상을 파악하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바란다"라고 말씀하셨다고...

 

 

꼬꼬무 시즌3 김주열 열사8

나중에 국회 조사단이 조사한 결과 해당 종류의 최루탄은 벽을 뚫고 들어가는 고성능 최루탄이었으며, 심지어 그 최루탄에는 "군중을 향해 쏘지 말 것"이라는 설명까지 적혀 있었다.

 

원래 최루탄은 군중을 향해 쏘는 게 아니라 공중에서 터뜨려서 최루가루로 시위대를 분산시키는 용도다. 그러나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는 경찰이 대놓고 직격으로 최루탄을 발사하기도 했다.

 

김주열의 시신 사진은 당시 부산일보 기자 허종(1924 ~ 2008)이 찍어 특종으로 보도되었으며, 시신이 김주열로 확인되자 용공 분자의 난동과 좌익 폭동으로 내몰린 마산 시민들의 울분이 다시 터져 올랐다.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꼬꼬무 시즌3 김주열 열사9

4·19 혁명 (1960년 3월 15일 ~1960년 4월 26일)

 

지역은 대한민국 전역으로 일어났으며, 원인으로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탄압이다.

 

김주열 열사의 희생은 3.15 부정선거에 항거한 마산시민들을 진압한 이승만 정부 경찰의 소행으로, 이에 분노한 국민들이 거리로 나오며 4·19 혁명으로 이어진다.

 

4·19 혁명 또는 4월 혁명이라고도 한다.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 대규모 시민들이 참여하며 전국적으로 확대된 반독재투쟁이자 혁명을 말한다.

 

3·15 마산 의거에 참여한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4월 11일 아침에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보도되면서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지며 격화된 것.

 

 

꼬꼬무 시즌3 김주열 열사10

한국전쟁이 휴전 협정으로 일시적으로 총성이 멎은 지 불과 7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1960년에는 이미 국민들 사이에 민주주의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요구는 적어도 5년 전부터 이미 있어 왔던 것이다.

 

4월 19일 경찰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섰다.

 

전국민적 저항과 군 지휘부의 무력 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고, 이 혁명의 결과로 과도 정부를 거쳐 6월 15일(6·15 개헌)에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 하야(下野) 뜻 - 관직이나 정계에서 물러나는 것을 말한다. 보통 대통령이 물러날 때 쓰는 말로, 다른 관직에서는 보통 사퇴라고 한다.

 

 

꼬꼬무 시즌3 김주열 열사11

4·19 혁명 주요 인물- 이승만 대통령, 이기붕 국회의장, 홍진기 내무장관, 장면 부통령, 윤보선.

 

참여인원은 10만 명 이상이며, 사상자는 사망 186명, 부상 1,500여 명. 결과는 이승만 정부가 붕괴되면서 이승만의 하야, 하와이로 망명, 장면 내각 출범.

 

 

꼬꼬무 시즌3 김주열 열사12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국밥집을 하면서 조용히 살다가 1989년 별세했다. 큰형도 병에 걸려 43세로 요절했다. 1995년 4월 11일 마산상업고등학교는 김주열 열사에게 1995년 37회 졸업생으로(김주열 열사가 당시 입학식이 4월 초라 입학하기 전 사망했지만) 명예 졸업장을 추서 했고, 그 졸업장은 김주열 열사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꼬꼬무 시즌3 김주열 열사13
꼬꼬무 시즌3 김주열 열사14

1987년 똑같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열사로 이한열 열사가 있다. 각각 4.19 혁명과 6.10 민주 항쟁의 원인이 된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나 이한열 열사는 머리 뒤쪽에 최루탄을 맞고 사망(즉사하지는 않았다) 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한열 열사는 6월 9일 최루탄에 맞고 7월 5일에 숨졌다.

 

2016년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유기한 차량을 운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해 당시 정황을 상세하게 증언했고 열사에게 사죄하고 묘지를 참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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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글 참고 : SBS 꼬꼬무 시즌3, KTV 라이브, tvN insight, 나무위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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