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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 가네코 후미코 관동대학살

두영~it 2022. 3. 9. 14:18

[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 가네코 후미코 관동대학살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나는 승리자다 - 제국을 뒤흔든 사나이 (이야기 친구 - 이동욱, 치타, 박효주)
2022년 3월 10일 목요일 밤 10시 30분 SBS 방송

 

이번 주 꼬꼬무 시즌3 19회는 독립운동가이자,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라는 시로 유명한 박열과 아내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이야기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일제 강점 시 시절 일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인데, 당시 관동대학살이라는 사건과 맞물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 가네코 후미코 관동대학살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1

일본 천황 황태자 암살

 

1923년 일본 열도에서는 엄청난 사건 하나가 큰 주목을 받았다. 바로 일본 천황의 황태자 암살 시도 사건.

 

당시 일본 강점기였던 시대를 생각해보면 이 사건은 대역 사건이었으며, 감히(?) 일본의 황태자를 시해하려고 시도했다는 것만으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주동자이자 주범으로 체포된 사람은 대한민국 국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아나키스트 박열, 그리고 박열의 아내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였다.

 

이 두 사람에 대한 재판이 열리게 되는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과 태도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된다. 보통 재판을 받기 위해 판사 앞에 선 죄인의 모습은 초라하기 마련인데, 박열은 조선 벼슬의 예복인 사모관대를 차려입었고, 아내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의 치마저고리 차림이었다.

 

일본에서 일본의 황태자를 시해하려고 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데 조선의 복장이라니. 그들의 당당함에 조선 사람은 물론 일본 사람들까지 놀랐다고 한다.

 

 

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2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복장만 당당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조선 사람이니 조선말로 재판을 받겠다며 당당하게 통역을 요청하였고, 재판은 연극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며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이렇게 여유 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재판을 받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그들은 왜 일본 황태자 암살 시도라는 죄명으로 재판을 받고 있을까. 이 이야기는 관동 대지진으로부터 시작된다.

 

 

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3

관동 대지진

 

일본은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나라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많은 피해를 입은 대지진이 몇 있는데 1923년 9월 발생했던 관동 대지진도 그중 하나다.

 

일본 가나가와현을 시작으로 총 3번 이어 발생한 이 지진은 진도 8.1~8.3까지 엄청난 강도의 지진이었다. 지진 지속 시간은 8분이나 이어졌는데, 보통의 지진이 1~3분 정도 지속되는 걸 생각해보면 얼마나 강한 지진이었을지 예상해 볼 수 있다.

 

관동 대지진은 해일을 동반했고, 여진 진도가 6~7 정도 될 만큼 추가 피해도 속출했다. 최소 10만 명의 사망과 실종이 발생했으며 최소 수십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총 20만 채 이상의 집이 부서졌고 수십만 명이 대피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 그런데 일본에서 지진이 난 것과 박열, 가네코 후미코의 황태자 암살 시도 사건이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4
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5

관동 대학살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많은 일본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고 집을 잃었다. 가족이 살아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으며 강제로 고향을 떠나야 하기도 했다.

 

그런 일본 사람들의 분노와 원망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일본 정부는 많은 부담이 되었고, 이러한 일본 사람들의 분노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본 정부가 선택한 방법은 당시 식민지이자, 일본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조선인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었다.

 

일본은 신문을 통해 조선인이 사회주의자와 결탁하여 폭탄을 이용해 테러를 하고 있고 강도, 방화 등을 일삼는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하면서 극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서 일본인을 죽이려고 했다. 조선인들이 독을 탄 만두를 일본인에게 나눠주고 있다"등 말도 안 되는 거짓 소문을 퍼트렸고, 결국 관동 대지진의 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의 분노가 조선인을 향하게 된다.

 

 

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6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빙자한 폭도 조직을 만들었고, 그들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조선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가차 없이 죽이기 시작했다.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헷갈리는 경우는 발음하기 어려운 일본말을 시켜서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면 죽이기도 했다. 당시 이렇게 거짓 소문으로 인해 수많은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 수가 6천 명에서 2만 명가량 된다고 한다. 조선인을 죽이는 방식도 여기 쓸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는데 이 글을 쓰면서도 화가 나고 안타깝다.

 

 

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7
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8

다시 박열 이야기로 돌아가자. 당시 험악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많은 조선인은 불안에 떨어야 했고, 일본 정부는 그런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인을 유치장에 가두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과 맞물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예비 검속으로 유치장에 갇히게 된다.

 

예비 검속이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사고를 칠만한 조선인을 미리 가둬두고 관리한다는 법이었는데, 흠.. 지금 들어도 어이없는 법이다.

 

이때쯤 조선인에게 누명을 씌워 일본인들의 분노를 돌렸던 약발이 떨어져 가고 있었고, 일본 정보는 좀 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일본인들의 분노가 일본 정부를 향하지 않게 하는 확실한 사건이 필요했던 일본은 때마침 구속되어 있는 박열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하지도 않은 일본 천황 황태자 시해 시도 사건으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이고, 그 재판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여러모로 주목을 받게 된다.

 

 

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9

박열

 

박열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고등교육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3.1 운동으로 퇴학을 당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서 신문 배달을 하면서도 학교를 다니는 등 배움에 대한 뜻이 깊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이자 무정부주의자였으며 시인이었고 언론인이었다. 거리낌 없고 거친 반항의 이미지를 가진 바람과 같은 자유로운 인물이었다.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박열은 흑도회, 흑우회, 불령사 등의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으며 후 데이 센진이라는 잡지 등을 발행하기도 했다. 이때 발표한 시의 제목이 바로 '나는 개새끼로소이다'이다. 이 시를 읽은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당시 박열이 포함된 무정부주의자들이 자주 모였던 어묵집에서 일하던 후미코가 박열에게 구애를 했다는 설이 있다.

 

 

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10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사실 박열이 독립운동 관련해서 폭탄 구입을 시도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폭탄은 손에 넣지 못했지만. 박열이 폭탄을 사려고 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일본 황태자 암살이라는 누명을 씌운 것.

 

어찌 보면 엄청 억울할 법도 한데, 박열은 그런 일본의 간사함에 장단을 맞춰준 것이다. 아마도 이 사건으로 열리는 재판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될 것이기 때문에, 재판 과정을 통해 관동 대학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한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보통 배짱이 아니다. 사건 자체가 엄청났기 때문에 무조건 사형을 받게 될 것이 뻔한데도 박열과 후미코는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재판을 받았으며 두 사람이 재판 과정에서 함께 찍은 사진까지 공개되기도 했다. 사실 이 사진은 당시 판사가 찍게 해 줬다고 알려져 있는데, 판사는 박열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만년필을 빌려주고, 홍차를 권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 입장에서는 박열이 순순히 재판에 응하고 죄를 인정해야 그들이 원하던 대로 일본인들의 분노를 조선인에게 온전히 뒤집어 씌울 수 있는데 호락호락하지 않던 박열 때문에 고생 꽤나 했을 듯.

 

그런 박열과 후미코를 구슬리기 위해 사진도 찍어주고, 홍차도 대접하는 등 박열을 구슬리려고 했던 것 같다. 이 일로 당시 판사는 해임되었고, 일본 정부도 곤욕을 치르게 된다.

 

 

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11

결국 사형을 선고받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다행히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서 감옥 생활을 하게 되고, 당시 결혼식을 하지 않았던 두 사람을 위해 변호를 맡았던 후세 다쓰지가 옥중 결혼식을 치러주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23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사인에 대한 부분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후미코의 시신은 변호사 후세 다쓰지가 수습했고, 박열의 친 형을 거쳐 지금의 문경시에 안장했다. 가네코 후미코의 묘는 지금도 문경시에 있는 박열 기념관에 있다.

 

박열은 이후 22년간이나 감옥 생활을 하다가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되면서 석방되었다. 해방 후에도 김구 선생, 양근환 등과의 친분으로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6.25 전쟁 이후 북한 보위부에 의해 북한으로 납북되었으며 1974년 평양에서 71세로 사망했다.

 

 

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12
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13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인 이면서도 무정부주의자였고 박열을 열렬히 사랑했으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가네코 후미코의 한국 이름은 박문자.

 

후미코는 어릴 때부터 힘든 삶을 살았고 호적이 없었기 때문에 같은 일본 사람들에게도 차별받고 무시당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시대, 일본인인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줬던 조선인들의 모습에서 큰 영향을 받았고, 박열을 만나게 되면서 뜻을 함께 하게 된 것.

 

나는 박열을 사랑한다.

그의 모든 결점과 과실을 넘어 사랑한다.

우리 둘을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이러한 가네코 후미코의 삶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외국인 독립운동가로 인정하고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일본인으로서 훈장을 받은 것은 박열을 포함, 조선인을 위해 수많은 변호를 맡았던 후세 다쓰지 이후 두 번째이다.

 

 

꼬꼬무 시즌3 19회 박열14

이재훈, 최희서 주연의 영화 박열을 봤을 때, 영화적으로 각색된 부분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실존 인물에 대한 영화이지만, 스토리가 극적인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당연히 허구의 설정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대부분 실제 있었던 일이었고 박열과 후미코, 그리고 당시 일본에서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의 상황과 삶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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