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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시즌3] 16회 아메리칸드림 1992 - LA폭동 (루프 코리안)

두영~it 2022. 2. 3. 17:00

[꼬꼬무 시즌3] 16회

아메리칸드림 1992 - LA폭동 (루프 코리안)
(이야기 친구- 허니제이, 윤하, 장항준) - 2022년 2월 3일, 밤 10시 30분 SBS방송

이번 주 꼬꼬무 시즌3, 16회는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 흑인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한국에는 덜 알려져 있지만 북미에서는 한국인들의 이미지 중 하나로서 '루프 코리안(Roof Korean)'또는 '루프탑 코리안'이라는.. 꽤 유명한 밈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야기.

[꼬꼬무 시즌3] 16회 아메리칸드림 1992 - LA폭동 (루프 코리안)

꼬꼬무 시즌3 아메리칸드림 1992 LA폭동

LA폭동 - 1992 Los Angeles riots (LA riots)

 

LA폭동은 4.29 시민 봉기(4.29 Civil Uprising)라는 명칭도 유명하며, 이 폭동의 기폭제였던 '로드니 킹'의 이름을 따서 'King Riot'이라고도 불린다.

 

* 발생일 : 1992년 4월 29일~ 5월 4일까지

* 발생위치 :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 원인 : 로드니 킹 사건

* 인명피해 : 사망 58명, 부상 2,383명, 체포된 사람은 13,779명, 재산피해 약 10억 달러 (1조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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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니 킹 사건

 

1991년 3월 3일 로스앤젤레스 경찰국 소속의 백인 경찰관 4명이 210번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과속하던 흰색 현대 포니엑셀 승용차 1대를 추격전 끝에 세우고 범인을 현장에서 붙잡는다.

 

경찰은 운전자 로드니 킹을 끌어냈지만, 그는 경찰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난폭하게 행동하고 경찰은 이에 폭력으로 대응한다. 당시 경찰은 킹이 마약인 PCP를 복용하고 매우 거칠어진 상태였다고 주장하는데 킹이 체포된 지 며칠 후 여러 번 마약 검사를 실시했으나 모두 음성이었다.

 

킹은 당시 강도, 폭행, 절도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가석방 된 상태였는데, 만약 자신이 과속으로 잡힐 경우 가석방 조건에 걸려 도로 수감되어야만 했기 때문에 거칠게 행동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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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투성이가 된 로드니 킹은 사정없이 발로 차여서 머리뼈 11군데 금이 가고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경찰관 4명의 유죄 판결을 확신했지만 재판 결과는 3명 무죄, 1명은 재심사였다.

 

당시 배심원은 10명의 백인, 1명의 히스패닉계 미국인, 1명의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구성되었고 검사 테리 화이트는 흑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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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니 킹 폭력의 참혹한 현장은 전파를 탔고, 응어리진 흑인들에게 이 사건은 인종 갈등에 불붙는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판결에 분노한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흑인들은 판결이 발표된 그날 길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시위는 점점 폭동으로 변해갔다. 곳곳에 방화 및 약탈, 총격전이 벌어지며 사상자가 속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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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은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거기다 당시 LA의 게토(빈민 거주 지역)에는, 금주법에 버금가는 실책인 마약과의 전쟁으로 인한 여파로 극빈층 흑인이 늘어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고, 자신들의 권리를 표현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 로드니 킹 사건이 터지자 격분한 흑인들이 자신들의 불만과 권리 요구를 폭동과 약탈, 방화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되었다가 나중에 폭동으로 변질되었다.

 

그 전에도 LA 경찰국은 흑인의 불신을 샀는데 당시 LA 경찰국장이었던 데릴 게이츠가 문제였다. 이 양반은 무자비한 진압으로도 유명했다. 마약사범 검거를 위해 장갑차에 충각을 달아 가정의 벽을 부수고 특수요원처럼 무장시킨 경찰을 투입시키는 방법을 썼던 것, 이 무자비한 진압 방식으로 이그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러니 로드니 킹 사건의 경찰관이 무죄를 선고받자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사건이 종결된 후, 1992년 6월 28일에 LA 경찰국장 데릴 게이츠가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이후 원인 제공자인 경찰관 4명은 연방 민권법 위반 혐의로 모두 재기소되었고 그 결과 2명에게는 징역 30개월 유죄가 선고되고 2명에겐 무죄가 선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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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코리안 (Roof Korean)

 

폭동의 불길은 LA 이주 한인들에게 번지게 된다. '루프 코리안' 또는 '루프탑 코리안'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했던 LA 폭동 당시, 대부분의 시민들이 패닉에 빠진 가운데 주로 세탁소와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던 한국인 이민자들이 폭도들로부터 자신의 가게를 지키기 위해 총기로 무장하고 코리아타운을 사수해낸 데서 유래한 유행어다. 

 

북미에서 한국인들의 이미지 중 하나로서 꽤 유명한 밈.

 

* 유래 : LA 폭동 당시 한인 자경단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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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타운

 

폭동이 일어난 지점과 그 인근에는 수많은 코리아타운이 있었다. 지금도 LA의 대표적인 흑인 게토(빈민 거주 지역)로 알려져 있는 컴턴은 LA의 코리아타운과 LA의 위성 도시인 토랜스의 한인타운 사이에 햄버거처럼 끼어 있다.

 

당시 LA 경찰은 폭동을 막기 위해 백인 거주 지역으로 가는 길을 완전히 막았지만 한인 지역으로 가는 길은 그대로 열어 놔 흑인들이 한인 지역으로도 몰려가게 만든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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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폭동이 LA 이주 한인들에게 번지게 된 이유

 

당시 미국 언론은 한흑 갈등을 정치적 요소로 사용하기 위해 1년 전 벌어진 두순자 씨 사건(라타샤 할린스 사건)을 집중 보도하며 흑인들의 분노를 LA 이주 한인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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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순자 씨 사건이란??

 

1991년 3월 16일, 미국 LA에서 리커 스토어를 운영하던 한인 이민자 1세대 두순자가 자신의 가게에서 15세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를 도둑으로 오인(그전에 30번 절도를 당했다고..) 리볼버 권총으로 사살한 사건이며, 이는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에서 한인 이민자들의 상점이 많은 피해를 입는 주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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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폭동 당시 경찰 등 공권력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해 사태가 심각하게 확산되었고, 특히 한인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던 곳이 LA였기 때문에 현지 한인 사회의 피해가 심각해졌다.

 

1992년 5월 3일 자 LA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한 총포상 점주는 "일대에 경찰차가 4대나 있었는데, 총소리가 나자마자 1초도 안 돼 죄다 도망가서 솔직히 실망했다"라고 인터뷰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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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에 만들어진 LA폭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L.A.Burning(불타는 LA)"에서 당시 한인 타운의 총포상 직원이었던 데이비드 주의 증언이 상세히 담겨있는데, 폭동 발발 당시 고용주였던 금은방 사장 리처드 박이 "총기 난사 사고가 발생했다. 도와줄 수 있겠느냐?"라는 연락을 하자 아무 고민 없이 나왔다고 한다.

 

막상 출동해보니 현장에 경찰차가 몇 대 와있는 걸 보고 '살았다'라고 생각했지만, 총격전이 시작되자 경찰은 순식간에 모두 도망갔고 결국 자신들이 직접 가게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습격은 정작 시위의 주체인 흑인들보다는 생뚱맞은 히스패닉 폭도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즉 진짜 시위대라기보다는 시위로 인한 치안 공백의 허점을 노린 사회 하층민들의 날강도짓이었음을 시사하는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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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폭동- 한인 자경단

 

결국 당시 한인 가게 주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하고 총기와 탄약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폭도들과 공성전을 벌인다.

 

* 자경단 뜻 - 한 지역의 주민들이 범죄나 재난에 대비하고 그 지역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조직한 경비 단체를 말한다. 

 

당시 자경단은 예비군들이 주도하여 군대식으로 운용되었으며 개중엔 월남전 참전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당시 한인들은 징병제로 인해 대부분의 성인 남성들이 군 복무 경험이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6.25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참전 경험자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에 시가전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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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대개의 가게들이 쇠창살과 안전문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평소의 도둑 하나 둘은 막아줄 수 있어도 무리 지어 떼로 덤벼드는 폭동 앞에서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옥상에서 총을 들고 총격전을 하면서까지 강력하게 경비를 서는 모습을 보여주자 폭도들이 알아서 피해 갔다.

 

이렇게 폭동 속에서도 털리지 않고 정상영업을 계속한 가게들은 옥상에서 총 들고 지킨 곳들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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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무기들은 모형 총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실총이었다고 한다.

 

실제 민수용으로 판매되었던 AR-15와 AK 계열 화기, 그리고 UZI가 사용되었다. 원래 AR-15와 AK는 단발 사격 전용으로 민수용으로 존재했고, UZI의 경우에는 자동화기로 판매가 되었다가 단종된 지 오래되지 않은 때였다. 또한 수출형 민수용 K1 기관단총을 사용하는 사진도 있다.

 

결론적으로 사진 속의 한국인들이 들고 있는 K1은 90년대 미국에 수출되던 K1A으로 당시 상품명은 AR-110C(K100탄환 사양, M193탄 사양은 MAX-1)이었다. 당연히 합법적으로 판매되고 자동기능이 없는 반자동이었다. 이때까지는 별도의 권총 그립과 견착 장치가 있는 반자동 소총 소지가 금지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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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 경력을 가진 예비군 출신 중심으로 자경단이 꾸려졌다.

 

재미교포들은 피해가 크긴 했지만 대처도 빨랐다. 사건 당시 한인 AM 라디오 채널인 라디오 코리아는 제보를 받으면 "OO에 피해가 생겼으니 가서 도와주십시오."라고 실시간 중계를 했고, 현실판 미닛 맨 라디오 이에 한인 청년단과 해병대 전우회로 이루어진 자경단이 지원을 나가는 식이었다.

 

이 대목은 무릎팍도사 이장희 편을 보면 그 일화가 자세하게 나온다. 이 구호활동으로 인해 당시 가수 이장희가 사장으로 있었던 라디오 코리아는 미국 사회의 주목을 받았고, 당시 대통령이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방문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폭도들 역시 시가전을 굳이 감수할 이유가 없어서 저항이 거세 자신들이 되려 죽겠다 싶으면 금방 달아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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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에 한인들 사회에서도 가게를 지켜야 하는가 아닌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고 한다.

 

총격전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이를 지키려면 결국 총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캘리포니아는 미국에서도 총기 규제가 강한 지역이라 한인들 내부에서도 그러다 독박쓰는 거 아니냐는 여론과 우리는 권리가 있다는 여론이 맞선 것이다.

 

한인들은 시민권자와 영주권자 등이 섞여 있어 권리 숙지가 안 되었고, 무기 소지에 대해 모두 같은 입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먼저 언급된 라디오 코리아에서도 맞서 싸우라는 방송을 내기 전까지 상당한 숙고가 필요했으며, 그걸 시행했을 때는 이미 수많은 건물들이 불타고 다수의 한인들이 흑인들과 히스패닉들에게 약탈당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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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폭동이라고 하면 보통 두순자 사건 때문에 미국 내에서 한인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다고 알려졌지만, 그 시절 한인 타운의 자경 활동을 직접 봤던 미국 경찰관들에게는 의외로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당시 공공기관 중에서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이 경찰서와 소방서였는데,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차에 폭도들이 총을 쏴서 불 끄러 가는 것을 막았던 일까지 있었다. 폭도를 잡으러가 아니라 단지 불 끄러 가는 사람에게 그런 짓을 했던 것이다.

 

결국 각급 소방서들은 선별적으로 장비와 인원을 파견해서 방어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한인 자경단들이 총을 들고 와서 이들을 지켜주었다. 즉, 경찰조차도 제발 누군가가 자신들을 지켜주기를 바랄 정도로 궁지에 몰렸을 때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으니 인식이 결코 나쁘려야 나쁠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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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여러 인종들이 고루 피해를 입었지만 유독 한인이 이렇게 강경하게 대응하게 된 것은 자기 가게를 지켜야 한다는 업주의 입장도 있겠으나, 6.25 전쟁을 겪으면서 북한이라는 적성 세력의 존재로 치안 문제에 대해서는 유독 보수성이 강한 한국 문화의 특성도 크게 작용했다.

폭도들에게 맞서 무장으로 저항하기를 한인사회만 하진 않았다. 히스패닉계 마을에서도 텃밭을 지키려는 갱단들이 저항하자 폭도들이 잽싸게 물러났다.

 

다만 원래부터 총 쏘는 불량한 갱단들이 자기 지역을 지키려고 저항하는 것보다는, '착하고 선량한 준법시민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결연하게 들고일어났다.'는 쪽이 훨씬 더 극적이기 때문에 별로 주목받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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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인 조직폭력배들의 행동

 

당시 한인타운에서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기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한인타운을 자신들의 구역으로 삼고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을 갈취하던 한국인 조폭들은 폭동이 터지자 한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혼란을 틈타 흑인이나 히스패닉들이 들이닥치기 전 한인 상점의 물건을 털고 잽싸게 도망쳤다.

 

애초부터 인간말종 범죄조직 조폭들에게 한인 수호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정작 이는 당시 히스패닉 갱단과 중국계 삼합회가 어찌 됐건 자신들의 물주들을 지키려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때문에 당시에 차이나타운과 히스패닉 주거지는 털리지 않았다.

사실 이 당시 한인타운에서 삥 뜯던 조폭들은 한국에서 기반을 잃거나 쫓겨온 이들이 대부분으로, 특히 범죄와의 전쟁을 계기로 늘어났다. 게다가 민족 정서상 같은 한국인이라도 범죄자들은 따돌림당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겉돎으로써 동질감이 적었다는 점도 원인이기도 했다.

하여간 이 때문에 한인들은 조폭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으며, 자경단을 구축해 대응했던 깡까지 더해져 사태 진정후 뻔뻔스레 다시 나와서는 돈 내놓으라는 조폭들에게 돈만 갈취하던 놈들이 뭐하러 오냐, 한 번만 더 그러면 쏴 죽이겠다며 분노하던 사례가 상당히 많이 생겨 오히려 조폭들이 힘도 못쓰고 부리나케 쫓겨난 사례도 부지기수로 생겼다.

 

그나마 조폭들이 명분이 없어져서 이 사건 이후론 코리아 타운에서 쪽을 못 쓰게 됐다는 게 이 폭동의 몇 안 되는 긍정적 효과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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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사회의 변화

 

폭동 사건 이후, 한인 사회에는 두 가지로 변화점이 있었다. 먼저 미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미국 국적을 취득하여 미국인으로서 권리를 얻어야만 한다는 의식이 생겼다.

 

이전까지 한인들은 한인 공동체에서만 살았고, 경쟁 대상도 보통은 같은 한국 이민자들이었으며, 영주권을 취득하는데서 멈추고 미국 시민권 취득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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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까지만 해도 한인사회는 개개인의 성공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미국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가와의 교류나, 자신들의 권리 상승을 집단적인 노력에는 관심이 적었고, 이 때문에 소수 인종이지만 자신들의 권리 상승을 위해 집단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던 흑인들에 비해 자신들의 권리를 더욱 주장하지 못하고 있던 실정이었다.

 

특히 이러한 한인 공동체의 특징은 흑인 공동체의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수십 년간 흑인 공동체 집단이 민권운동을 통한 권리 상승에 노력을 할 때마다 많은 백인들은 한인들을 이른바 사회에 잘 적응한 모범적 소수 집단으로 치켜세워주면서 흑인 공동체 집단의 민권운동을 폄하해왔고 이 때문에 흑인 커뮤니티의 입장에서는 한인 커뮤니티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들의 이러한 소극적인 경향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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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한인 공동체의 소극적인 정치활동은 흑백 양쪽에서 일방적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이렇듯 흑백갈등이라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으로 얻어맞고 "총알막이"로서 내몰린 이후, 한인들은 교민들의 의견을 대변하고 권리를 지켜 줄 정치가의 존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경제적인 자립에만 허덕였던 수많은 한인 교포 세대를 지나, 상대적으로 교육을 잘 받은 한인 2세대들을 중심으로 미국 시민권 취득 운동과 정치활동의 참여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써, 한인들은 지역 정가에 많은 정치 기부금을 전달하기 시작했고, 이는 미국 지역 정치인들이 한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를 기반으로 한인 출신 정치인들의 대거 증가하는 결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한인들이 교포들만의 세상에서 탈피하여 공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라타샤 할린스 살해사건조차도 방아쇠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한인 사회는 주류 백인 사회와의 갈등만 아니면 관심 없이 생활했다. 

 

물론 관심이 없었던 만큼 적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이러한 무관심을 주류 백인사회는 다른 소수인종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저항할 때마다 한인들을 방패막이로 이용했고, LA폭동은 한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지금까지 주류 백인사회에 의해 방패막이로 이용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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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한인사회는 이때를 기점으로 적극적으로 다른 소수인종집단과의 인적교류를 시작하는데, 이는 한인 사회의 주류가 영어가 서툴고 미국 사회에서 경제적 기반을 닦는 데에 바빠 적응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던 기존의 1세대에서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자라와 미국 학교를 다니면서 미국식 문화를 학습하고, 다른 소수인종과 교류를 많이 한 2, 3세대로 바뀌었다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또한 이 시점 이후 들어온 새로운 한인 이민자들은 기존의 이민자들과 달리 전문직들이 많았고 이들은 상대적으로 정치문제에 관심이 많아 한인 공동체의 정치참여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그 변화의 결과 2020년에 일어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직후에는 많은 동양인 커뮤니티가 직접 BLM과 같은 소수인종 문제와 관련된 사회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동참해 인종간 갈등을 완화시키는 한편, 일부 폭동으로 번져 혼란이 발생했을 때에는 LA 총영사관과 한인회가 나서서 LA 한인타운의 치안 유지를 위해 주 방위군 투입이 결정되었음을 알림으로써 주 방위군은 윌셔 대로의 코리아타운 주요 길목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혼란을 방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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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미국 미주리 주에서 또 다른 흑인 소요사태인 퍼거슨 소요가 벌어졌고, 또 한인 상가가 불타고 약탈당했다.

 

정치계 진출이건 인종 교류 건 결국 아무런 영향도 없이, 다시금 흑인 동네 옆에 있다는 이유로 한인들이 또다시 피해를 보게 된 것.

 

미국/인종차별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 결국은 인종차별의 피해자인 흑인들이 다시금 그들의 분노를 자기들보다 더 약한 소수인종들에게 표출한 것이다. 그 결과 흑인들에 대한 이미지만 안 좋아지고 경찰들의 강경진압에 대한 정당성만 강화되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자 흑인 사회 내에서도 이를 비판하며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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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폭동시 공권력이 폭동과 약탈에 대처 못하는 추태를 보이고 한인들이 자체 무장하여 자신들을 지키는 모습으로 총기 소지에 대한 옹호론이 강화되었고 한인 등 백인과 흑인에 비해 소수인 아시아계와 동유럽, 아프리카 이민자의 총기 소유 비율이 높아져 이제는 총기규제 시 이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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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의 소용돌이에서 무사했던 곳도 있었는데, 당시 42세였던 홍정복 씨가 운영하던 밴네스 마켓이 대표적이다.

 

평소 가정 형편이 어려운 흑인과 히스패닉 주민들에게 무료로 생필품을 준다거나, 기초생활수급자이면서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이 정부에서 받은 생활비로 술을 사려고 하자 아내에게 전화를 함으로써 막거나,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좀도둑을 향해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면서 걱정해주는 등의 선행으로 지역 사회에서는 MAMA라는 별명으로 유명했고, 폭동 당시 흑인 주민과 갱단이 자진해서 주변을 호위했을 정도.

 

그러나 안타깝게도 7년 후인 1999년 2월 3일 히스패닉 무장 강도에게 살해당했고, 흑인과 히스패닉 주민들이 교회 장례식에 대거 모여 눈물로 추모했다.

 

이후 흑인 갱단이 홍정복 씨를 죽인 범인을 잡아서 죽여버린다는 경고 쪽지까지 붙였고, 실제로 이 히스패닉 범인 중 한 명은 경찰에 잡혔으며, 다른 한 명은 실종되었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흑인들에게 끝없는 선행을 베푼 한인조차도 히스패닉 무장 강도에게 살해당할 만큼 당시 LA 및 미국은 인종에 따른 범죄가 만연한 사회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흑인 갱단인 크립스는 서로 라이벌인 블러즈와 시위 참가와 주민보호 목적으로 잠시 연합했다고도 한다.

 

다이 하드 3에서 이 사건이 잠깐 언급되며, 영화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에서도 잠깐 나온다. 이후, 2008년 키아누 리브스 주연 영화 <스트리트 킹>에서 경찰서장 역으로 잠깐 나왔으며 이로부터 2년 뒤인 2010년 4월 16일, 만 83살로 병사했다.


2017년 4월 28일에는 연합뉴스에 한인 2세들이 말하는 LA폭동의 기억이라는 기사가 올라왔으며, 2021년 9월에 비디오카메라로 로드니 킹 사건을 촬영해 고발했던 조지 홀리데이가 코로나19 합병증으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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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폭동에서 자경단 활동 덕인지 폭도들에게 살해된 한인은 없었다.

 

유일한 한인 희생자는 청년단 소속이었던 19살 이재성으로 한인 간의 오인사격으로 안타깝게 사망했다. 서로를 폭도로 착각해서 벌어졌고, 가해자는 처벌되지 않았다.

 

한흑 갈등으로 인한 로스앤젤레스시 전체의 피해액은 7억 1천만 달러 선으로 집계되었으며, 이 중 한인 업소는 약 2,300개 업소가 전소되는 등 한국인 피해액은 3억 8천만 달러로 절반에 달한다.

 

당시 한국 정부가 강력히 항의하여 한미간의 외교 관계가 나빠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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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이 사건은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물론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의 제정 이후 미국 전역에서 인종차별이 철폐되었지만, 이는 법적으로만 철폐된 것이었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인식은 당연히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차별을 표현하는 단어는 암묵적으로 터부화되었는데, 이를 테면 인종을 색깔이 아니라 그 발상지로 지칭하는 풍조가 퍼졌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같은 명칭이 대표적으로, 그 당시의 픽션 등에서는 인종차별적인 악당이 등장하여 '너희 검둥이, 아니 요즘은 소위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 부르던가?'라는 식의 대사를 통해 이러한 변화를 언급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원래는 흑인을 택하는 니그로란 단어 자체도 차별적 요소가 없었으나, 이 단어와 슬랭에 해당하는 니거란 단어가 비하적으로 쓰이자 흑인들이 이 단어로 지칭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유색인종 (colored)"란 단어로 바뀌었고, 이 단어에도 거부감을 일으키자 결국 "블랙"으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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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흑인이 아닌 다른 인종이 니거를 쓰는 건 미친 짓이고, 니그로나 유색인종이란 단어는 흑인들 본인도 쓰지 않으나, "블랙"이란 단어는 많이들 쓴다.

 

흑인들이 본인들을 지칭할 때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고 하는 경우는 없다시피 하고 거의 블랙이라고 하며, 타인종이 하는 경우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편. 정확히는 "난 블랙이지만 니들이 날 블랙이라고 부르면 차별하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약간 의심스러워" 정도 인식이다.

이 사건으로 결국 1990년대까지도 미국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LAPD는 데릴 게이츠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싹 물갈이되었으며, 당시로서는 많지 않던 비백인 경찰이 중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경찰 수사에 인권 문제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고, 경찰들이 매우 몸을 사리게 되었고 이전부터 관행적으로 사용해오던 강압수사 및 폭행과 협박이 줄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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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작품들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Grand Theft Auto: San Andreas의 주요 무대인 로스 산토스의 모티브는 LA이고 스토리도 흑인 갱스터와 부패한 경찰관이 적대하는 이야기다.

작중 시간 배경도 1992년. 거기다 최후반부에 나오는 폭동까지 완전히 LA 폭동의 오마주다. 게임 내에서 로스 산토스 경찰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 보면 경찰관들이 시민 한 명을 다굴치는 이스터 에그가 있는데, 이는 로드니 킹 사건의 패러디인 듯하다.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1995년작 영화 스트레인지 데이즈에서도 로드니 킹 사건과 이후 벌어진 폭동과 유사한 내용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블랙팬서에서도 직접적인 언급은 안 하지만 사건의 발단이 되는 배경이 1992년이며 흑인들이 무장을 준비하는 모습에서 연관성을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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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2020년, 미니애폴리스-세인트폴 시위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의 미국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라는 주제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기여한 몽족계 미국인 경찰 토우 타오(Tou Thao)가 구설수에 오르며 재조명받았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 이후 루프 코리안 밈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알려지고 주요 언론을 통해 기사화된 지금도 당시 루프 코리안들의 용기와 단결력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내는 것은 매한가지나, 밈으로서의 활용에 대해서는 국내 또한 이런저런 시선이 뒤섞여 있다.

 

대체적으론 한국인들의 단합력과 용기에 대해선 좋게 평가하나 민감한 인종갈등에 활용되는 것은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은 편이며, 반대로 시위의 변질된 폭력성에 대해 주목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미국의 대안우파 네티즌들과 비슷한 시각을 내비치는 경우도 있다.

현재 코로나로 동양인에 대한 혐오범죄가 터지고 한인들도 피해를 입자 네티즌들은 다시 루프탑 코리안을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과 만약 그 자리에서 개기면 총알 박아주자는 극단적인 주장도 나오고 있다.

 

대중매체에서

1988년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는가?"라는 다큐멘터리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재미교포 영화감독 크리스티나 최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4.29(사이구 / 영어 제목 Sa i Gu)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1992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억새바람》후반부에서 이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었는데, 해당 부분은 원작 소설에 안 나오는 오리지널 에피소드다. (1991년 김유미 작가가 지은 소설이 원작이다.)

 

2010년작 SBS 드라마 아테나:전쟁의 여신에서 손혁(차승원)이 윤혜인(수애)를 이 사건 때 만난다. 영화 더 퍼지의 도입부 한 비디오에서 권총을 들고 다른 사람을 쏘는 퍼지 비디오가 LA 폭동 당시의 한인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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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사례

 

대공황 약탈 폭동 (1929~1932), 뉴욕 할렘 폭동 (1935), LA 폭동 (1965), 와츠 폭동 (1965), 뉴어크 폭동 (1967), 디트로이트 폭동 (1967), 마틴 루터 킹 암살 관련 폭동 (1968): 미국 흑인들에겐 영웅 중 영웅이나 다름없는 마틴 루터 킹이 갑자기 암살당했으니, 미국 흑인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마이애미 폭동 (1980): 특히 해당 사건의 발단이 된 '아서 맥더피 폭행치사사건'은 로드니 킹 사건과 진행 양상이 대다수 비슷했다.

 

신시내티 폭동 (2001), 오클랜드 폭동 (2009), 퍼거슨 소요 (2014),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 (2020) - 일부 지역에서 폭동도 일어났으나, 전국적으로 보면 평화적인 시위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인한 폭동들에 대해서도 흑인들에 의한 인종 폭동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백인들이나 히스패닉, 아시아계도 약탈에 많이 참여했다. 위의 퍼거슨 소요와는 확실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게다가,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폭동을 선동한 자가 백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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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아시아계, 특히 한국계 미국인 커뮤니티에 흑인에 대한 거센 반감과 분노를 야기하며 한국계 이민자들과 흑인과의 갈등이 이후로도 불거지게 한 사건이다. 또한 모든 일의 근원인 로드니 킹 본인이 강도질을 벌인 대상이 다름 아닌 한국계 미국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한인들 중에선 로드니 킹을 안 좋게 보는 사람도 있다.

폭동 이후 흑인 커뮤니티에서도 이후 자성과 반성의 목소리가 나왔으며 이후 흑인 커뮤니티에서 이 일에 대해 공식 사과를 하였고 이후 흑인 사회의 지도자 중 한 명이 이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한국계 이주자들에 대해 사과하였다. (흑인 지도자 LA폭동 사과 LA 폭동 8년 만에 흑인사회 한인들에게 공식 사과)

물론 지금도 한인과 흑인 갈등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이후로 이어지는 한국계 이민자들의 흑인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일으키고 있다. LA 폭동의 여파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셈.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한인 사회에서 흑인 사회와 대화와 교류를 하며 이 일의 재발 방지를 위한 협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흑인 사회에서도 반성과 함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꾸준히 한인 사회와 교류를 하며 이 사건에 대해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LA시 당국에서 이 사건으로 아주 처참하게 데였고, 미국 내 비판자들로 부터 가루가 되도록 까인 만큼 LA시 차원에서 한인 사회, 흑인 사회의 협력을 지원하며, 한인 사회에 대해서도 행정적 편의 등의 신경을 쓰게 되었다.

 

 

사진출처, 글 참고 : SBS 꼬꼬무 시즌3, ᄐᄇᄐᄇ TVTV, 엠빅뉴스, 나무위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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