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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시즌3] 27회 대구지하철 참사 (전융남 씨 이야기)

두영~it 2022. 5. 5. 15:06

[꼬꼬무 시즌3] 27회 대구지하철 참사

(전융남 씨 이야기)

5월 5일 방송되는 SBS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는 전하지 못한 목소리, 지화(火)철 1080호 미스터리' 편이다. 너무도 안타까운 이야기,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야기.

[꼬꼬무 시즌3] 27회 대구지하철 참사 (전융남 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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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하철 참사

발생일 -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발생위치 -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탑승인원 - 471명

 

*사망 - 192명 (이 중 186명은 신원이 확인되어 유가족에게 유해를 전해 줄 수 있었지만, 시신이 완전히 소실된 3명, DNA는 확보했으나 연고자를 찾지 못한 3명은 미신고자로 남아있다.)

 

*실종 - 6명 (사망자는 시신이 없더라도 사망이 인정되었지만, 이때는 사망이 인정되지 않은 경우다. 시체를 찾지 못하는 사망자인 셈이다. 그리고 시신은 있는데 훼손 상태가 심하여 신원 확인은 물론이고, 더욱 심한 경우에는 성별마저 판별이 불가능한 시신도 존재했던 모양이다. 이들은 신원 확인이 안 되어서 코드명으로 있다.)

 

*부상 - 15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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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 김대한

대구 지하철 참사를 일으킨 방화살인 범죄자.

 

출생 - 1947년 2월 8일 경상북도 예천군
사망 - 2004년 8월 30일 (향년 57세) 경상남도 진주시
사인 - 뇌졸중
직업 - 무직 (前 택시 기사, 화물차 기사.)
가족 - 부인, 슬하 1남 1녀

 

1947년에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태어났다. 범행 이전에는 대구시에 거주했다. 운송업과 같은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였으나, 2001년 4월 20일에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지적 장애 2급 판정을 받은 후 백수로 지냈다. 그러다 2003년 2월 18일에 범행 도구인 라이터와 휘발유가 담긴 샴푸통을 준비한 뒤, 근처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구입해 샴푸통에 담고, 대구 도시철도 1호선의 송현역에서 운행 번호 1079호에 탑승하여, 맨 첫 번째 경로석에 앉아있다가 열차가 중앙로역에 정차하자 열차에 불을 질렀고, 자신의 몸에 불이 붙자 당황하여 탈출했다. 그리고 이것은 대구 지하철 참사의 불씨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맞은편에 정차한 운행 번호 1080호 열차는 사전 통보가 제대로 되지 않아 승객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대피가 늦어졌고, 그 결과 192명 사망, 151명 부상, 21명 실종이라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범행 동기는 "뇌졸중 치료를 받았음에도 전혀 회복되지 않자 자살을 생각했는데, 혼자 죽기엔 너무나도 억울해서였다고. 그래 놓고 본인은 화상을 입게 되자 겁을 먹고 도망갔다.

대구광역시 북구 소재의 한 병원에서 피해자인 척 치료를 받다가 긴급 체포되어 1심과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진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듬 해인 2004년 8월 30일 오전 8시 45분 뇌졸중으로 인한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진주 의료원으로 이송되던 도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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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자 김대한은 당시 화상을 입어 달아나던 중 북구 노원동 3가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범죄 사실이 드러나 검거, 구속된 것.

 

그는 마치 정신 이상처럼 굴려는 듯 진술이 뒤죽박죽이었으며, 정신이상자가 저지른 사고라는 기사가 나오면서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편견을 부채질하는 거 아닌가 우려도 나왔지만 정신과 의사들의 판단에 의하면 정신이상은 아니라고 했다. 또한 심신장애도 없었다고 한다.

 

결국 1심에서 현존전차방화치사죄 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항소하였으나 2심에서도 항소를 기각,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그러나 상고는 포기하고 교도소 안에서도 횡설수설했다고 한다. 그리고 진주교도소로 이감됐다가, 2004년 8월 30일 지병인 호흡 곤란과 뇌졸중으로 급사했다.

김대한은 2001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른쪽 상반신, 하반신 모두 장애가 와서 지적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김대한의 방화 사유는 심한 우울증 후 정신 질환이 심해진 데 따른 판단력 상실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한의 아들은 대구 중부경찰서에 출두하여 '아버지가 심한 우울증을 앓았으며 남의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등 정신적으로 심한 문제가 있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지병인 뇌졸중으로 인한 울분을 방화로 토한 사건이라는 분석도 있어 방화 사유에 대한 의견은 아직도 분분하다. 김대한의 직계 가족은 사건 이후 곧 경북 지역을 떠났다. 친척들도 이쪽 집안은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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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오른손에 화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 중인 전융남씨 (왼쪽사진)

전융남 씨 이야기

범인 김대한을 최초로 목격하신 분.

 

출근시간이 지나 다소 한가로웠던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0분경 전융남 씨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중앙로역 근처에 있던 대구우체국으로 컴퓨터 교육을 받으러 가는 중이었다.

「중앙로 역 바로 전 승강장인 반월당 역에서부터 앞에 앉은 사람의 행동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오른쪽에는 청색 가방을 끼고 있었는데 안에는 플라스틱 우유통이 들어있었으며 오른손이 불편한 듯 왼손으로 뚜껑을 만지작거리는데 제대로 열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전 씨는 「목이 타서 우유를 마시려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오래전부터 부인이 중풍으로 앓아 손을 제대로 쓸 수 없었기에 이 사람 또한 그러는 것 같아 측은한 마음이 들어 도와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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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그 사람이 왼쪽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더니 켰다 껐다 하더군요」 「저는 깜짝 놀라 왜 거기서 위험하게 라이터를 켜느냐고 소리쳤어요」

전동차가 반월당을 지나 중앙로 역으로 진입하던 때였다.

그 순간 「퍽」하는 소리와 함께 그 사람이 안고 있던 플라스틱 통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 사람이 들고 있던 통은 바닥에 던져졌고 그 자신도 다리에 불이 붙어 고통스러운 나머지 승강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불길은 지하철 의자부터 순식간에 타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우선 이 사람부터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웃옷을 벗고 불을 끄기 시작했습니다」

객차 안의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순간 지하철 구내역의 전기는 나가고 암흑에 휩싸였으며 매캐한 연기가 전 씨의 코를 파고들었다.

「독한 냄새 때문에 겨우 옷으로 입을 막고 엉금엉금 기다시피해 지하철을 빠져나왔습니다. 정말 다시는 생각하기 싫은 악몽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전 씨는 경찰에 자신이 겪은 일을 진술함으로써 사고 발생 2시간 여만에 용의자를 검거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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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구지하철 2호선에서 방화미수범을 제압한 김형석, 최고영, 주세별(왼쪽부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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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커진 이유

 

1079 열차 기관사는 화재 발생 이후 초기 진화에 실패하자 중앙사령실에 통보하지 않은 채 대피했고, 결국 이로 인한 지하철 사령실의 오판으로 9시 55분에 원래 역을 무정차 통과해야 했던 1080열차가 중앙로역 반대편 선로에 정차했다.

 

* 당시 1080이 출발 후 도착한 중앙역-대구역 사이의 거리는 700m, 기관차가 아무리 천천히 출발해도 2분 남짓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운전사령이 판단을 달리 했다면 1080차의 피해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중앙 사령실에서 119에 신고를 늦게 했고, 1080열차 기관사가 출입문을 열어주었지만, 이후 마스터 콘트롤 키를 뽑고 탈출하였다. 기관사가 일부러 마스터키를 뽑고 탈출한 것이 아니고 사령실의 지시였다.

 

사실 위의 경과 항목에도 나와있다시피 비상상황 종료 이후 열차탈취를 막기 위해 기관사는 탈출 전 마스터키와 제동 핸들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1080열차 기관사는 역사내 연기로 인해 1079열차에 불이 붙은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지하철은 가연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배웠기에(불량 내장재로 인해 화재가 커졌다) 이렇게 심각한 화재였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고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였기에, 1080열차 기관사는 사후 안전 관리 문제로 금고 5년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흑역사] 대구지하철 참사, 당시 통신녹음 공개

 

사건 확대의 원인으로는 다음 내용들이 꼽힌다.

마스터키가 뽑히는 바람에 출입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전동차의 경우에는 대체로 이렇게 생겼다. 마스터키가 뽑히면 비상제동/브레이크 등 일부 기능을 제외하곤, 열차의 모든 기능이 그 즉시 정지된다. TGV의 경우, 마스터키가 감지되지 않으면 즉시 제동이 체결된다. 물론 기관사는 기관차 탈취를 막기 위해 운전실을 떠날 경우 무조건 마스터키와 제동 손잡이를 뽑고 탈출해야 하지만, 그 당시 기관사가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조치를 취했거나 운전사령의 정확한 지령을 통해 마스터키를 제거하지 않고 출입문 개방 시도를 하거나 직접 수동으로 열었다면 더 큰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비상시 문을 수동으로 열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갇힌 사람들이 많았다. 지하철 문은 보통 문 옆 의자 아래나 벽면에 있는 뚜껑을 열고 그 안의 레버를 당기면 손으로 열 수 있는데, 사고 전에 이 방법이 시민들에게 홍보가 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레버 위치와 사용법에 대해서 아주 조그맣게 써놨기 때문에 관계자나 철덕, 지하철 타면서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 아니면 알기 힘들었다. 당시에는 비상레버 사용법이 지금처럼 전동차 문짝과 의자 옆면에 크게 적혀있지 않았고 레버 주변에만 작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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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3년 당시에 국내에서 운용되던 전동차들은 공압식 문으로, 밸브 코크가 모두 의자 밑에 위치해 있어서 진짜로 방법을 아는 사람 아니면은 문 여는 비상코크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도 드물었고 이 비상코크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아서 공기가 모두 빠지기 전까지 몇 초 정도의 대피 지연이 불가피했다. 대피 지연으로 인해 열차 안에서 호흡곤란에 빠진 승객들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참사 이후 이런 심각한 문제가 지적받으면서, 이후엔 개방 레버가 출입문 바로 옆으로 옮겨지고 전자식 도어의 보급이 확산됐다. 하도 홍보를 많이 해서 이제는 지하철 문과 스크린도어를 수동으로 열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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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 셔터가 일찍 닫히면서 나오려던 사람들도 나오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화재가 난 1079열차에 비해 훨씬 많은 인명피해가 1080열차에서 발생하였다.

 

물론 방화 셔터에는 화재가 발생한 쪽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닫히는 경우를 대비해 문이 하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자주 이용하는 역이든 아니든 평소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 아니라면 찾기 힘들다. 찾는다 해도 좁은 문으로 다수가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화재 당시 중앙로역은 연기가 발생하여 시야가 극도로 차단되어 있는 데다가 단전 상태였기 때문에 전등까지 모두 나가 문 손잡이를 찾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 손전등 기능이 많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당시엔 그런 기능이 없었고, 피처폰의 저열한 화면 밝기로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구지하철 공사의 거듭된 인력 감축 때문에 안전요원이 없었고, 역사 상주 직원이 4~5명뿐이었으며 안전 교육을 제대로 이수받지 못했다. 때문에 신속한 대피 안내가 불가능했다.

다행히도 탈출 방법을 알고 있던 사람이 몇몇 객차에 타고 있었기에, 그나마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예컨대 많은 인명피해가 난 1080 열차의 경우 4호 객차에 타고 있던 승객 중에는 당시 철도청 공무원이었던 권춘섭(당시 금호역 역장)이 사태를 직감하고 비상 코크를 취급하여 출입문을 수동 개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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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하철 방화 참사 당시 반대편 차선에서 중앙로역에 들어온 1080호 전동차의 한 객차 안에서 연기가 차오르자 승객들이 영문도 모른 채 손으로 코와 입을 막고 불안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이 공개됐다. 당시 이 전동차에 탄 사람들은 ‘잠시 기다리라’는 내용의 안내방송을 들은 뒤 전동차 출발이나 문 열리기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이 사진을 언론 등에 제공한 류호정 씨는 이 전동차를 타고 있다가 두 컷의 사진을 찍은 뒤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으나 연기에 질식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한겨레신문, 2003년 2월 19일 치) 사진/ 류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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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의 대부분은 직접적인 화상보다는 유독가스에 의한 기도 화상으로 사망했다고 추정되지만, 그렇다 해도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유해들은 형체도 못 알아볼 만큼 처참한 상태였다. 심지어 뼛가루조차 못 찾아들고 있던 지팡이 하나만으로 사망이 인정되기도 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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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이후


사고 다음날 정부는 대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고, 당월 25일 대구광역시 당국은 윤진태 대구광역시 지하철 공사 사장을 해임시키면서도 그다음 날 시청 공무원, 지하철 종사자, 대민지원 온 육군 병력들을 동원해 현장 및 월배 차량기지로 실려온 사고 열차들을 물청소하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해 유족들과 주변인들을 기겁하게 만들고 분노케 했던 사건도 있었다.

 

이 사고로 국내외에서 구호 성금으로 668억 원이 모금되었다. 중앙로 일대 도로의 지반 구조물이 손상되며 2003년 2월 26일부터 버스 및 차량 통행이 일시적으로 금지되었다가 2003년 4월 10일이 되어서야 해제되었고 사고로 운행이 중단되었던 대구지하철 1호선은 2003년 10월 21일 전 구간 운행을 재개하고, 2003년 12월 31일 중앙로역이 10개월 만에 복구를 마치며 정상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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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12주기 추모벽이 중앙로 역 지하 2층에 마련되었다고 한다. 국민성금 5억 2,000만 원을 들여 길이 27m, 폭 3m, 340㎡ 넓이로 조성되었으며, 추모 공간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추모벽과 사건 당시 불에 그을린 벽과 그리고 화재의 열기에 수화기가 녹아내린 공중전화, 당시에 있었던 매점, 혈압측정기, 지하철 사물함, ATM기와 희생자의 유류품 등도 전시하고 있다.

 

팔공산에 위치한 대구광역시 시민안전테마파크에는 당시 불에 탄 1079 열차 전동차 몇 량이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건을 가정해서 인체에 무해한 짙은 연기를 뿌려놓고 당시의 사건을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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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에 대구광역시의 한 취객이 문재인 당시 의원을 죽이러 간다고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가 검거되는 사건이 있었다. 문재인 의원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위해선 열심히 뛰면서 정작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을 때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사실 문재인 대통령은 대구 지하철 참사가 벌어졌을 당시에도 유족들을 비밀리에 도왔음이 유족 중 한 명인 박성찬 씨에 의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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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금고 5년형을 받은 기관사는 2008년 출소 후, 설령 그때로 돌아간들 다시는 전동차에 오르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이 사건 이후로 강화된 지하철 역사 내 인화물질 반입 통제가 시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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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들의 마지막 메시지

각종 매체들을 통해 희생자들이 휴대전화를 통해 사람들과 마지막으로 대화하던 내용들이 알려져 눈시울을 적셨다.


「잘 잤어요. 여긴 날씨 맑음. 오늘 하루 보고 싶어도 쬐금만 참아요.」
사고 발생 7분 전(오전 9시 46분) (사고 발생 9시 53분) 예비 신부 송혜정이 예비 신랑 이호용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 좀 있으면 중앙로역을 지난다. 곧 갈게. 조금만 기다려."
사고 발생 3분 전(오전 9시 50분) 서동민이 선배 송두수에게 한 통화기록 중


"지금 지하철인데 거의 사무실에 도착했어. 저녁밥 맛있게 준비해 놓을 테니깐 오늘 빨리 퇴근해요!"
사고 발생 4분 전(오전 9시 49분) 김인옥이 남편 이홍원에게 한 통화기록 중


"여보, 여보! 불이 났는데 문이 안 열려요. 숨을 못 쉬겠어요. 살려줘요... 여보 사랑해요, 애들 보고 싶어!"
사고 발생 8분 후(오전 10시 01분) 통화기록 중


"지현아 나 죽어가고 있어. 나를 위해 기도해줘."
개신교 모임 강사 허현이 강사 강지현에게


"엄마가 여기 와도 못 들어와!"
오전 9시 54분(사고 발생 1분 후), 대학생 딸이 어머니 김귀순에게 한 통화기록 중


"아... 안 돼... 안 돼!"
오전 9시 58분(사고 발생 5분 후), 이현진이 어머니에게.

이현진은 이해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이해 서울대학교 입학식에서는 식전에 추도 의식을 가지고 예정된 신입생 환영 행사를 취소했고, 유족은 보상금으로 서울대 측과 협의하여 장학기금을 조성하였다. 이현진 양은 사망 전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동생에게 '누나가 잘 못해줘서 미안하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메시지도 남겼다.


"불이 났어. 나 먼저 하늘나라 간다."
김창제가 부인에게


"엄마 지하철에 불이 났어."
"영아야, 정신 차려야 돼."
"엄마 숨을 못 쉬겠어."
"영아, 영아, 영아..."
"숨이 차서 더 이상 통화를 못하겠어. 엄마 그만 전화해."
"영아야, 제발 엄마 얼굴을 떠올려 봐."
"엄마 사랑해..."
장계순과 딸 이선영의 마지막 휴대전화 통화 내용


"어무이! 지하철에 불이 나 난리라예."
"뭐하노, 빨리 나온나."
"못 나갈 것 같아예. 저 죽지 싶어예. 어머이 애들 잘 좀 키워주이소."
아들 박정순이 노모 황점자에게. 이날 그는 직장을 얻으러 가는 중이었다.


"열차에 불이 났다. 살아나갈 수 없을 것 같으니 꿋꿋하게 살아라."
어머니 최금자가 아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고 착하게 커야 해. 아빠가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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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화내고 나와서 미안해. 진심이 아니었어. 자기야 사랑해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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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없어도 밥 꼬박꼬박 챙겨 먹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알겠냐. 그리고 기다리지마 나 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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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정떨어진다ㅋㅋ 우리 그냥 헤어지자 ㅋㅋ"
죽음을 예감한 한 남성이 자신이 죽은 걸 연인이 알면 슬퍼할까봐 일부러 기분 나쁘게 이별 메시지를 보낸 것.

 

 

대구지하철 참사 대통령 노무현
2003년 2월 20일 대구지하철 방화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방문한 노무현 전 대통령.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당시 대통령은 16대 노무현 대통령(2003년 2월부터~ 2008년 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지막 재임기(~2월 24일)이자 동시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첫 해(2월 25일~)이다.

 

2003년 2월18일 대구 지하철 화재로 3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을 당시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고발생 사흘만인 2월21일 대통령직 인수위 회의에서 "희생자 가족들과 국민에게 머리 숙여 사과한다. 하늘을 우러러 보고 국민에게 죄인된 심정으로 사후 대처하겠다"고 밝혔었다.

 

 

사진출처, 글참고 : 꼬꼬무, 유퀴즈, 그때그뉴스, 가톨릭신문, 나무위키, 한국강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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